일찍이 유홍기(劉鴻基)와 만나 개화사상에 눈을 떴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일본의 발전상에 관심을 가지고 밀항하여 처음 시찰에 나선 개화파의 선구자이다.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가 청수관(淸水館)에 오자 그들과 자주 접촉하며 일본어를 배웠다.
1879년(고종 16) 6월 유대치·김옥균(金玉均) 등 개화당 요인의 도움으로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밀항하였다. 이후 경도(京都)의 혼간사[本願寺]에서 10개월간 체류하며 변모된 일본 사회를 살피고, 동경으로 가서 일본의 조야 정치가와 접촉하는 한편, 수신사(修信使)로 와 있던 김홍집과 만나 친교하였다.
1880년 9월 김홍집과 함께 귀국, 김홍집의 소개로 민영익(閔泳翊)을 알게 되었다. 그 뒤 그 사랑방 연당(蓮堂)에 거처하며 민영익의 주선으로 국왕을 만나고, 일본의 국정과 세계 각국의 형세를 알리어 국왕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1880년 10월 주일청국공사 하여장(何如璋)에게 한미 조약 체결을 알선해 주도록 요청하기 위해 일본으로 밀파되었다.
사명을 마친 뒤 1개월간 동경에 체류하면서 흥아회(興亞會)에도 참석하며 일본의 지도자와 접촉하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앞으로 미국과의 수호조약 체결을 위해 미리 조약문의 초안을 작성하였는데, 이것은 1882년 1월 김윤식(金允植)이 청나라에 가서 이홍장과 조약 내용을 검토할 때 기준이 되었다.
1881년 2월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 참모관에 임명되어 신사유람단이라는 일본시찰단을 파견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이 때 유길준(兪吉濬)·윤치호(尹致昊)와 같은 유학생을 보낸 것은 전적으로 이동인이 계획한 일이다.
이 해 3월 참모관으로 총포와 군함 구입의 임무를 받고 이원회(李元會)와 함께 일본에 파견될 예정이었으나 출발 직전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는데, 이는 암살당한 것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