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중무(仲茂). 경상도 창녕 출신. 윤원진(尹元鎭)의 아들이다.
1859년(철종 10)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 이조참의·사간원대사간과 승지를 지낸 뒤 1865년(고종 2)에 전라도암행어사로 출두하여 관기를 다스리고 잠시 의주부윤을 지냈다.
1868년 다시 상경하여 병조참판·사간원대사간·예조참판을 여러 차례 거듭 맡아보았고, 1874년 진하 겸 사은사(進賀兼謝恩使)의 부사로 청나라에 사행하여 국제적인 정치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귀국 후 호조참판·한성부판윤·성균관대사성을 역임하면서 도총부부총관을 겸하고 있다가 1876년 한일수호조규 때 접견대신 신헌(申櫶)의 부관으로서, 일본과 국교를 맺고 조선이 개항하게 되는 조약 교섭의 실무진으로 활약하였다.
그 뒤 공조판서·예조판서를 지내고 1881년에 경상도관찰사의 일을 잠시 맡았고, 다시 중앙관계에 예조·형조판서를 거듭 지냈으며, 도총관을 지내기도 하였다. 1881년에 사헌부대사헌이 되었으며, 1883년에 정부당상(政府堂上)과 우부승지를 지냈고, 1883년에 예문관제학·홍문관제학과 시강원우빈객(侍講院右賓客)을 역임하였다.
1884년 예문관·홍문관 제학을 맡아보았고, 병조판서의 일을 잠시 담당하기도 하였다. 개항 전후기의 관료이자 오랫동안 국정을 담당한 문관으로 순탄한 일생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