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경운(景運). 아버지는 이조판서 박태상(朴泰尙)이며 어머니는 상의원정(尙衣院正) 조속(趙涑)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했으나 질병으로 공부에 힘쓸 수 없어 과거를 포기하였다. 1710년(숙종 36) 음보(蔭補)로 영소전참봉(永昭殿參奉)이 되고, 1713년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를 거쳐 의금부도사를 지냈다. 그 뒤 청양현감·정산현감 등을 지냈으나 번번이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듬해 해주판관(海州判官)을 지내고, 남원부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724년 평소부터 박필건의 치적을 들은 이조의 전랑인 조문명(趙文命)이 천거해, 선산부사가 되었다. 1728년 선산부사로 있을 때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우방장(右防將)으로서 거창에서 반란군을 격파해 정희량(鄭希亮)·이웅보(李熊輔) 등 반란군의 거물들을 죽였다. 그 공으로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이 되어 금릉군(錦陵君)에 봉해졌다.
1729년 부총관(副摠管)이 되고, 이듬해 한성부우윤·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지냈다. 1731년 곡산부사(谷山府使)가 되었을 때 부임하기도 전에 관사(官舍)가 불탔으나, 다시 짓는 데 농사일에 바쁜 백성들의 힘을 동원하지 않아 칭송을 듣기도 하였다. 1734년 한성부좌윤이 되고, 이어 삼화부사(三和府使)를 지냈으며 1737년 호조참판에 이르렀다.
공신으로 책봉되었으나 자신의 공훈을 내세우지 않았으며, 당론과 사치가 나라와 집안을 망치는 고질이라고 보고 유언을 남겨 자녀들을 경계시켰다. 완소(緩少: 노·소론의 첨예한 대립에서 상대 당에 대한 입장이 온건한 소론 인물) 계열로서 조문명·송인명(宋寅明) 등이 주도했던 탕평책에 적극 동조하였다.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양정(襄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