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정부는 성종 때 건원중보(乾元重寶)라는 철전(鐵錢)을 발행하고, 숙종 때 의천의 건의를 받아들여 해동통보, 삼한통보, 은병 등의 화폐를 주조하여 유통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고려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민간에서는 여전히 쌀이나 추포(麤布) 등을 주요 거래 수단으로 이용하였으므로 화폐가 널리 유통되지 못하였다.
원 간섭기 이후 화폐로 사용되던 쇄은(碎銀)과 추포의 질이 더욱 떨어지는 등 화폐제도가 문란해지자, 1391년(공양왕 3) 3월에 중장랑 방사량(房士良)이 시무책을 올려 추포를 금지하고 동전과 지폐를 사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같은 해 7월에 도평의사사에서도 송나라의 회자(會子)와 원나라의 보초(寶鈔) 제도를 수용하여 고려통행저화(高麗通行楮貨)의 제도를 설치하고, 5종포와 함께 사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화폐제도의 문란을 바로잡기 위해 홍복도감(弘福都監)을 폐지하고 자섬저화고(資贍楮貨庫)를 설치하여 저화(楮貨)를 발행하도록 하였다.
자섬저화고의 기원은 1308년(충렬왕 34)에 충선왕이 설치한 제용사(濟用司)이다. 제용사에서는 물화(物貨)의 유통과 저화의 발행을 맡아보았다. 그러나 1310년(충선왕 2)에 자섬사(資贍司)가 설치되면서 제용사는 폐지되었으며, 자섬사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혁파되었다.
자섬사의 뒤를 이어 1391년(공양왕 3)에 자섬저화고가 설치되어 저화를 발행하였으나 1년 만에 폐지되면서 저화 발행은 또다시 중단되었다. 저화는 이후 한동안 발행되지 못하다가 1401년(태종 1)에 하륜의 건의에 따라 초법(鈔法)을 도입하고 사섬서(司贍署)를 설치하면서 재개되었다.
고려 말 자섬저화고의 설치는 정부가 화폐제도의 문란을 바로잡고, 백성들의 편의를 보장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그러나 저화는 금이나 은, 구리와 같은 실질적인 가치를 지닌 화폐가 아니라 신용화폐였으므로 안정성이 보장된다는 믿음이 생기지 않으면 유통되기 어려웠다. 자섬자화고가 1년 만에 폐지된 것은 고려 말의 정치 · 경제적 혼란과 왜구의 침입 등으로 사회적인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저화가 신용화폐로 기능하지 못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