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용창 ()

고려시대사
제도
고려시대, 홍주(洪州) 관내의 부용창산(富用倉山)에 있었던 창고.
제도/관청
설치 시기
고려 전기
폐지 시기
고려 말기
상급 기관
고려 호부
내용 요약

부용창(富用倉)은 고려시대에 홍주(洪州) 관내의 부용창산(富用倉山)에 있었던 창고이다. 『고려도경(高麗圖經)』의 저자 서긍(徐兢)이 충청도 홍주 관내 부용창산에 있다고 기록한 고려시대의 창고이다. 개경의 우창(右倉)과 함께 전쟁이나 흉년에 대비하여 곡물을 비축하는 기능을 하였다.

정의
고려시대, 홍주(洪州) 관내의 부용창산(富用倉山)에 있었던 창고.
기능과 역할

송나라 사절 주1의 견문록 『 고려도경(高麗圖經)』에 홍주 관내 부용창산에 있었다고 기록된 창고이다. 서긍 일행은 1123년 6월 8일에 자운섬(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군 연도로 추정)을 떠나 안면도 일대로 북상하면서 부용창산과 홍주산을 지났다. 『고려도경』에는 부용창산이 홍주의 산중에 있다고 간단히 기록되어 있어 정확한 위치를 비정하기는 어렵지만, 서긍의 당일 항로를 고려하면 부용창산은 보령의 성주산, 홍주산은 홍성의 오서산으로 비정된다.

『고려도경』에는 부용창 외에도 우창(右倉), 용문창(龍門倉), 대의창(大義倉), 해염창(海鹽倉), 상평창(常平倉) 등 여러 창고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 부용창과 우창은 전쟁과 흉년에 대비하여 곡식을 비축하는 창고였다고 한다. 뱃사람들은 부용창(芙蓉倉)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는데, 서긍은 이를 부용산(富用山)의 오기라고 하였다.

의의 및 평가

부용창에 대한 기록은 『고려도경』에만 등장하고 있어 위치와 규모 등을 알 수없다. 다만 서긍이 비상시에 대비하여 곡식을 비축하는 창고였다고 기록한 것으로 볼 때 군량미나 주2를 보관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원전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단행본

서긍 저, 조동원 외 역, 『고려도경』(황소자리, 2005)
김위현, 『고려시대 대외관계사 연구』(경인문화사, 2004)
조영록, 『한중문화교류와 남방해로』(국학자료원, 1997)
森林雅彦 編, 『中近世の朝鮮半島と海域交流』(汲古書院, 2013)

논문

문경호, 「12세기 초의 동아시아 국제정세와 신주의 고려 항로」(『한국중세사연구』 55, 한국중세사학회, 2018)
문경호, 「1123년 서긍의 고려항로에 대한 재검토: 협계산~마도 안흥정 구간을 중심으로」(『역사와 담론』 78, 호서사학회, 2016)
문경호, 「1123년 서긍의 고려항로와 경원정」(『한국중세사연구』 28, 한국중세사학회, 2010)
김위현, 「여·송관계와 그 항로고」(『고려시대 대외관계사 연구』, 경인문화사, 2004)
森平雅彦, 「忠淸道沿海における宋使船の航路-高麗圖經の事例」(『2011年度九州史朝鮮学部會 發表資料』, 2011)
森平雅彦, 「高麗群山亭考」(『年報朝鮮學』 11, 2008)
王文楚, 「兩宋和高麗海上航路初探」(『文史』 12, 1981)
주석
주1

중국 송나라 때의 문신(?~?). 고려 인종 1년(1123)에 고려에 사신으로 다녀간 후 ≪고려도경≫을 지어 고려의 실정을 송나라에 알렸다.    우리말샘

주2

재난을 당하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이나 물품을 주어 돕는 쌀.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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