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주 ()

고대사
제도
삼국시대, 신라의 지방 관직.
이칭
이칭
촌간(村干)
제도/관직
설치 시기
내물마립간 대
폐지 시기
성종(成宗, 981∼997) 대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촌주(村主)는 삼국시대, 신라의 지방 관직이다. 신라는 경주를 중심으로 영역 확대를 꾀하였고, 점차 주변 지역을 아우르면서 해당 지역의 토착세력을 국가체제로 편입하고자 하였다. 촌주를 그 편입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결국 신라 말에 사회 혼란이 발생하자 새로운 사회를 이끈 주체로 다시 등장하였으며, 고려에서도 체제 내 편입과 정비를 도모하였다.

정의
삼국시대, 신라의 지방 관직.
설치 목적

지방민들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하여 재지(在地)의 유력자에게 주어진 관직으로, 신라 행정조직의 말단에 해당한다. 신라는 고대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인근의 많은 소국(小國)들을 복속시키거나 점령하였다. 신라는 복속된 소국의 기존 지배질서를 그대로 이용하여 그 지역을 통치하였다.

복속 과정이 평화적이었느냐 비평화적이었느냐에 따라 복속 소국의 지배계층을 어떻게 대우하는가가 달라졌겠지만, 어떤 경우에도 복속 소국의 기존 체제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지방민에게 주어진 촌주라는 관직은 복속 소국의 지배계층 중 가장 유력한 자에게 주어진 것임에 틀림없다.

촌주의 직제가 성립된 시기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한 자료가 없다. 과거에는 창녕의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에 보이는 촌주라는 명칭이 신라의 촌주에 관하여 가장 오래된 기록이므로, 촌주라는 직제도 진흥왕(재위: 540∼576) 대를 전후한 시기에 성립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1989년 4월, 경상북도 영일군 신광면 냉수리에서 발견된 포항 냉수리 신라비에 ‘村主(촌주)’라는 글자가 확인됨으로써 종래의 견해는 수정이 불가피해졌다. 냉수리비의 연대는 아직 확실하지 않으나 대략 지증왕(재위: 500∼514) 대 전후로 추정되므로 촌주라는 직제도 지증왕 대 이전부터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삼국사기』 권45 열전 박제상(朴堤上)조에는 내물마립간(재위: 356∼402) 대에 수주촌간(水酒村干) · 일리촌간(一利村干) · 이이촌간(利伊村干) 등의 명칭이 보인다. 이러한 ‘촌간’은 촌주의 전신이거나 이칭(異稱)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촌주 또는 이에 준하는 직제의 성립은 신라가 인근의 소국을 복속하여 지배하기 시작한 때부터이며, 늦어도 내물마립간 대에는 마련되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촌주가 직제로 완성되어 금석문에 등장하는 것이 지증왕 대 전후로 보인다.

임무와 직능

직급의 구조

촌주제의 내용에 대해서도 상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진평왕(재위: 579∼632) 대의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에 군상촌주(郡上村主) · 군중촌주(郡中村主)의 명칭이 보이고, 『삼국사기』 옥사조(屋舍條)에도 진촌주(眞村主) · 차촌주(次村主)의 구별이 있는 것으로 보아, 촌주에도 직급의 분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의 옥사조에는 “진촌주는 5두품(五頭品)과 같고, 차촌주는 4두품과 같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를 남산신성비에 나오는 지방민들의 관등과 비교하여 보면, 군상촌주와 군중촌주는 10∼13등급에 해당하는 관등을 가지고 있어 5두품에 해당하는 신분이며, 촌주의 아래에서 실지 공사를 담당하였던 작상(作上) · 장척(匠尺) · 문척(文尺) 등은 모두 12등급 이하의 관등을 가지고 있으므로 4두품에 해당됨을 알 수 있다.

이로 볼 때, 당시 재지의 유력자들은 일정한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그중 대표자가 촌주였고, 그 아래의 여러 유력자들도 중앙정부로부터 관등과 직함을 부여받은 촌주에 준하는 존재였다. 이들이 뒤에는 모두 촌주라고 불려 짐에 따라 진촌주 · 차촌주의 구별이 생긴 것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후대의 재지 세력들은 집단적으로 촌주층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주요 임무

촌주가 맡은 소임은 지방에 파견된 지방관인 군주(軍主) · 도사(道使) · 군수(郡守) · 현령(縣令) 등을 보좌하여 지방민을 통치하는 행정적인 임무가 주된 것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때로는 군사적인 소임도 담당하였던 것 같다.

지방의 유력자에게 주어진 관직에는 촌주 외에도 군사(軍師) · 사인(使人) 등이 보인다. 이들은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주로 나타난다. 이 중에서도 군사는 그들이 받은 관등이 촌주에 비해 결코 낮지 않다. 이들은 주로 촌락민으로 구성된 법당(法幢) 군단(軍團)을 지휘하였다. 촌주와 군사의 관계는 양자를 동일인이 겸하였을 가능성도 없지 않으나, 촌주가 주로 행정적인 성격이 강한데 반해 군사는 군사적 성격의 지휘자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관할 구역

촌주가 관할한 구역은 몇 개의 자연촌으로 이루어진 지역촌일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이는 후대의 현상이고 초기에는 군 · 현에 소속된 여러 촌주들이 군 · 현의 행정에 공동으로 참여하고 또 책임도 지고 있었다고 추측된다.

왜냐하면 촌주에 관한 여러 사료 중에 구체적으로 그 관할구역을 표시한 예는 단 하나가 있을 뿐이며, 남산신성비에서는 실제 축성 공사를 담당하였던 작상 이하의 출신지와 이들을 통솔한 2명의 촌주의 출신지가 다르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선발 방식

촌주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선발되어 임명되었는지 또 그 임기가 있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거의 자료가 없다. 촌주의 임명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의 진성여왕(재위: 887∼897) 대에 반란을 진압하다 전사한 촌주 연우(連佑)의 아들이 10여 세의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촌주가 되게 하였다는 내용이 유일하다.

이것만으로 촌주의 직위가 세습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촌주의 임명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중앙정부나 지방관의 간여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경제 기반

촌주는 국가에 대하여 봉사하는 대가로 일정한 경제적 혜택을 받았다. 일본의 쇼소원〔正倉院〕에서 발견된 『 신라촌락문서』에는 연수유답(烟受有畓) 가운데 촌주위답(村主位畓)이라는 토지가 있다. 그러나 이 땅이 촌주의 원래 소유지에 대해 면세 혜택을 준 것인지 아니면 일정한 토지를 촌주에게 더 지급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변천사항

통일신라에 들어와서는 촌주의 성격에도 몇 가지 변화가 있었다. 우선 이들의 관등이 외위(外位)에서 경위(京位)로 점차 바뀌었으며, 그 직능도 더욱 세분되었다. 하대에 들어와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됨에 따라 촌주층은 스스로 중앙관제를 모방하여 관반체제(官班體制)를 형성하였다. 이에 따라 촌주라는 직명은 점차 사라지고 관등명으로 그 신분을 표시하거나 대감(大監) · 제감(弟監) · 장군(將軍)과 같은 경칭을 쓰면서 그 세력을 확장시켜나갔다.

신라 하대의 촌주는 특히 선종(禪宗)의 사원과 관련을 맺어 각종 불사(佛事)의 재정적 부담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이들이 과거의 중앙행정기구의 말단 지위를 벗어나 점차 호족(豪族)으로 성장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이렇게 점차 세력을 성장시킨 촌주들은 후삼국시대를 거쳐 고려 왕건(王建)이 고려를 건국하자 일부는 중앙귀족이 되었고, 그 나머지는 지방에 웅거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종(재위:949∼975) 대부터 점차 왕권이 강화되고, 성종(재위: 981∼997) 대에 이르러서는 더욱 많은 수의 지방관이 파견되고 또 향직(鄕職)이 개편됨으로써 이들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어 대부분 향리로 전환되었다.

의의 및 평가

신라는 경주를 중심으로 영역 확대를 꾀하였고, 점차 주변 지역을 아우르면서 해당 지역의 토착세력을 국가체제 내로 편입하고자 하였다. 촌주를 그 편입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결국 신라 말 사회 혼란이 크게 일자 새로운 사회를 이끈 주체로 다시 등장하였으며, 고려가 건국된 후에도 체제 내 편입과 정비를 도모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상(上)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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