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장은 놋쇠를 다루어 각종 기물을 만드는 기술 및 그 일에 종사하는 장인이다. 놋쇠는 꽹과리·식기 등 두드려서 만드는 방짜와 촛대·향로처럼 아연합금의 주물유기로 나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놋쇠를 좋아하여 신라 때 이미 유기 등을 관장하는 철유전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지방마다 유기점이 생겼다. 백성들은 이곳에서 유기를 샀으며 양반가나 부호들은 맞춤그릇을 썼다. 근래 놋그릇이 대중화되면서 방짜는 쇠퇴하였다. 예로부터 경상북도 봉화의 유기는 질이 좋기로 유명하다. 1994년 봉화유기장을 경상북도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즉, 놋갓장이를 말한다. 1983년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놋쇠는 한자로 유(鍮)라 표기하지만 옛 기록에서는 유석(鍮石) · 유철(鍮鐵) · 황동(黃銅) · 주동(鑄銅) · 진유(眞鍮) · 두석(豆錫) · 주석(朱錫) · 향동(響銅) 및 청동(靑銅) 등 그 용어가 다양하다.
그만큼 놋쇠는 구리합금의 대표적인 금속으로, 주된 합금재료인 석(錫, Sn)과 아연(Zn)의 넣는 비율에 따라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다른 성질의 놋쇠를 만들게 된다. 그 하나는 징 · 꽹과리 · 대야 · 양푼 · 식기 · 수저 등 두드려서 만드는 방짜와, 다른 하나는 촛대 · 향로 · 화로처럼 아연합금의 주물유기이다.
또한, 주물의 경우에도 단순히 구리에 아연만 넣는 데 그치지 않고 석을 함께 첨가하는 사례도 적지 않다. 동전이나 동종 등이 대표적인 것으로 꼽힌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놋쇠에 대한 기호가 예로부터 유별난 편이다. ≪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철유전(鐵鍮典)이란 기구를 두어 철과 유석을 관장하였다.
당시 신라의 종은 아주 이름이 났으므로 자연히 동을 주조하는 여러 가지 합금술이 발달하였을 것이며 각종 종이나 불구, 화로 등의 청동제품과 유기제품의 생산을 가능케 하였을 것이다.
순동(純銅)의 용해도는 섭씨 1,083도로 비교적 높은 온도이지만 청동(靑銅)은 용해온도를 섭씨 900도까지 낮출 수 있다. 따라서 청동기물은 기본 성분인 동을 비롯하여 석을 혼합하고 소량의 납 · 아연을 넣어 주조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청동제품과는 달리 유기제품은 구리와 주석만으로 합금된 ‘방짜’라고 일컬어지는 가장 좋은 질의 놋쇠로 만들었다.
<오주서종박물고변 五州書種博物考辯>에 “유는 동에 주석을 넣은 것이며 놋쇠라고 한다. 이것을 만들려면 구리 한 근에 주석 4냥을 합치면 된다.”라고 하였다. 고려시대의 식기와 제기 등은 이와 같은 상질의 놋쇠로 제작되었다.
이후 유기의 사용이 더욱 증가하였으며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지방마다 놋점(유기점)이 따로이 생겨나 각종 유기를 다루었는데, 일반백성들은 이곳에서 사다 썼으며 반가(班家)나 지방의 부호들은 맞춤그릇을 썼다.
조선 초 ≪ 경국대전≫에 따르면 유장(鍮匠)이 경공장에 13인, 외공장에 전국적으로 35인이 배치되어 있었으나, 조선 말기에는 경공장에 17인, 외공장에 36인으로 늘어났다. 이 유장이 방짜기술자에 한한 지칭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 밖에도 놋쇠를 다루던 장인으로는 경공장에 쟁장(錚匠) · 두석장(豆錫匠) · 주장(鑄匠) · 경장(鏡匠) 등이 있었다.
그런데 근래 놋그릇이 대중화됨에 따라, 일이 번거롭고 값비싼 방짜보다는 아연합금의 주물이 언뜻 보기에 황색과 비슷하고 값도 싸 이를 사용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방짜의 쇠퇴를 가져왔다.
6·25동란 후까지 유기의 명맥이 이어진 고장은 안성 · 익산 · 남원 · 장흥 · 순천 · 함양 · 김천 · 봉화 · 동래 등이었으나, 양은과 플라스틱 그릇의 보급으로 말미암아 그들 지역조차 거의 공장이 문을 닫고 기술자들은 흩어져 버렸다.
현 기능보유자는 주물장으로서 경기도 안성의 김근수(金根洙), 방짜장으로서 서울의 이봉주(李鳳周), 전라남도 보성의 한상춘(韓相椿, 2009년 보유자 해제) 등이 있다.
유기의 제작은 크게 부질법(주조기법)과 방짜법(단조기법)으로 대별되는데, 경상북도 최북단의 봉화(奉化)는 부질하여 만드는 주물유기의 고장으로 그 명성이 이어졌다. 부질법은 녹인 쇳물을 일정한 틀에 부어 만들어내는 방법으로 쇳물을 붓는 일은 가장 중요한 기술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봉화군 봉화읍 삼계리 일대는 전 면적의 대부분이 산지와 임야로써 쇠를 녹이는데 필수 재료인 숯의 생산이 용이하고 수자원이 풍부한 천혜의 입지조건 때문에 일찍이 유기가 성행하였다.
예로부터 봉화의 주물 유기는 질이 좋기로 유명하였으므로 제사용구를 비롯하여 놋그릇 등 많은 수요가 있었다. 따라서 1994년 경상북도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 봉화유기장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으며, 그 기능보유자로는 고해룡(高海龍), 김선익(金善益)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