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다루는 장인을 목수라고도 하는데 목수에는 대목장(大木匠)과 소목장(小木匠)이 있다. 대목장은 궁궐·사찰·주택 등 건축물의 가구(架構)를 짜는 공정을 담당하였고, 소목장은 건축의 구조물이 아닌 창호(窓戶: 창과 문), 조정(藻井: 소란 반자), 벽장, 실내에 비치되는 목조(木造) 가구나 목조 기물 등을 담당하였다.
우리나라에는 나무가 많아 일찍부터 목기를 사용하였으나 소목장이라는 용어는 고려시대의 기록에서야 비로소 볼 수 있다. 『고려사(高麗史)』, 『고려도경(高麗圖經)』을 통해 소목장이 국가와 왕실 소용 목공예품들을 제작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 목공예 관련 부서로는 도교서(都校署), 중상서(中尙署), 공조서(供造署)가 있었다. 도교서에는 나무로 작업하는 담당 장인이 있었고, 공조서에도 소목장, 마장(磨匠)이 있어 왕이 쓰는 다양한 기물들을 제작하였다. 조선시대 관련 부서로는 선공감(繕工監), 공조서(供造署) 등이 있었다. 조선 초기까지는 목가구가 주로 왕실, 상류 계층을 중심으로 제작·사용되었으나, 시대가 내려오면서 민간에 널리 보급되고 종류도 많아져 지역적인 특성이 현저히 나타나게 되었다.
조선시대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목공 기능을 가진 장인을 대목장, 소목장으로 나누지 않고 목장(木匠)이라는 명칭으로 통합하여 관리하였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과 각종 의궤(儀軌)에서는 소목장으로 분리하여 관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여러 궁(宮)과 각사(各司)에서 필요로 하던 공산품을 충당하기 위하여 각 분야에 일정 장인들을 예속시켰는데 중앙 관청에 소속된 장인을 경공장(京工匠)이라 하였고, 지방 관아에 속한 장인을 외공장(外工匠)이라 하였다. 경공장은 1415년 태종이 선공감에 명하여 숙련된 목수 100명을 선발하여 장부에 올린 것이 효시가 되었다. 특히 조선시대 의궤에는 연향에 필요한 가구들을 제작한 소목장의 이름들이 자세히 적혀 있다. 장인들은 참여 횟수에 따라 1~3등급으로 분류되었고 그에 맞는 요포(料布)를 지급받았다.
조선시대 풍속화로 윤두서(尹斗緖, 16681715)가 그린 「선차도(旋車圖)」, 조영석(趙榮祏, 16861761)의 「수공선차도(手工旋車圖)」 에는 목기를 깎는 장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또한 프랑스 국립기메동양박물관 소장 김준근(金俊根)의 「목기갈이장이그림」에서도 나무 재료를 틀에 걸고 칼로 돌리면서 목기를 제작하는 장인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제작하는 소목장을 갈이장이라고도 불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