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부상서(兵部尙書)로 서경유수(西京留守)를 겸직하고 있던 중, 1170년(의종 24) 무신정변이 일어나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 등이 의종을 시해하고 많은 문신들을 죽이니, 이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1174년(명종 4)에 군사를 일으켰다.
북계(北界)와 동계(東界)의 여러 성에 격문을 보내어, 개경의 중방(重房)이 북계의 여러 성을 토벌하기 위하여 군사를 내었으니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당할 수 없다고 선동하자, 절령(岊嶺) 이북의 40여 성이 모두 내응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윤인첨(尹鱗瞻)을 원수로 한 토벌군을 보내왔으나 절령역에서 크게 패퇴시키고 개경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최숙(崔淑) 등이 거느린 기병 수십 명의 기습을 받고 패하여 서경으로 퇴거하였으나 여세를 몰아 대동강까지 추격해온 관군을 물리쳤다.
조정에서 다시 윤인첨을 원수로 한 토벌군을 보내 서경을 공격하는 한편 항복을 권유하자 금나라에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이 일을 맡은 김존심(金存心)이 배반하여 윤인첨에게 항복함으로써 실패하였다.
다시 서언(徐彦)을 보내 절령 이북의 40여 성을 들어 금나라에 내속하기를 청하고 원병을 요청하였으나 금나라 황제는 도리어 서언을 잡아 고려에 보내왔다. 그 뒤 1176년 정부군의 협공으로 서경이 함락되고, 조위총도 사로잡혀 죽음을 당하였다.
조위총의 반란은 반무신난(反武臣亂)의 대표적인 사례로, 서북면의 농민들이 개경 무신집권자와 무신귀족의 탐학과 수탈에 대한 반발로 일으킨 사건이다. 이 반란은 무신정권을 전복시켜 정권을 쟁취하려는 정치적 반란이 아니라 당시 사회·경제적 혼란에 대한 서북면 민중의 봉기였다는 측면에서 민란의 성격이 보다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