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지휘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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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사
제도
고려시대 지방으로 보내던 임시 사행.
이칭
이칭
계점도지휘사, 조선도지휘사, 방어도지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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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시대 지방으로 보내던 임시 사행.
개설

주로 군사적인 외적 방어·전함 축조·군량 수송 등 의 목적에서 파견되었다. 이에 따라 계점도지휘사(計點都指揮使)·조선도지휘사(造船都指揮使)·방어도지휘사(防禦都指揮使)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내용

대몽항쟁기인 고종 연간에 처음으로 파견되기 시작해 여말까지 존속하였다. 특히 충렬왕과 공민왕 때 자주 파견되었다. 한편 이보다 위계는 낮지만 같은 역할을 수행한 지휘사가 있었다.

충렬왕 때에는 하나 또는 여러 개의 도(道)를 단위로 파견되어 주로 군사행정적인 업무를 수행해 원나라의 일본 정벌에 필요한 군사력 및 군량·전함 등을 조달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이렇게 도를 단위로 자주 파견되는 도지휘사의 업무를 돕기 위해 충렬왕 초에는 판관(判官)과 녹사(錄事), 또는 도평의녹사(都評議錄事)만으로 구성되는 하부기구가 갖추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1301년(충렬왕 27) 도지휘사를 군사행정 만이 아니라 군사지휘까지를 총괄하는 상설 기구로서의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로 개편하려는 노력이 원나라의 제지로 좌절되면서, 이 후 약 50여 년간 이의 파견은 중단되었다. 그러다가 1350년(충정왕 2)경상도 지역에 대한 대규모의 왜구 침입을 계기로 군사지휘자로서의 도지휘사를 다시 파견하였다.

특히 1356년(공민왕 5)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탈환을 계기로 반원정책(反元政策)이 본격화되고, 홍건적(紅巾賊) 및 왜구의 침입이 극심해지자 양계(兩界)는 물론 개경(開京) 인근 지역에 방어를 목적으로 한 도지휘사를 자주 파견하였다. 주로 정3품 이상의 고위 관원이 이에 임명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정치제도사연구(高麗政治制度史硏究)』(변태섭, 일조각, 1971)
「고려후기(高麗後期)의 군사(軍事) 지휘체계(指揮體系)」(오종록, 『국사관논총(國史館論叢)』 24, 1991)
「고려말(高麗末)의 도순문사(都巡問使)」(오종록, 『진단학보(震檀學報)』 62,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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