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달부(達夫). 태조 때의 공신인 이희능(李希能)의 6대손이다.
인종 때에 문과에 급제해 직한림원(直翰林院)을 거쳐 우정언을 역임하였다. 1148년(의종 2)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로서 사신이 되어 금나라에 다녀왔다. 당시 사절수행의 군사에게 은 1근씩을 거두는 게 상례였으나 전혀 거두지 않아 청렴함을 보였다. 이듬해 우사간 지제고(右司諫知制誥)가 되고 1155년 5월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국자시를 주관하여 김단보(金端寶) 및 황문장(黃文莊) 등을 합격시켰다.
이어 동북면병마부사, 1356년 12월 추밀원좌부승선(樞密院左副承宣)을 역임했고 의종의 총애를 받았다. 1157년 천례 출신 환관 정함(鄭諴)을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에 임명하는 데 필요한 고신(告身: 임명장)에 우승선 좌간의대부(右承宣左諫議大夫)로서 왕의 압력에 굴복해 서명하였다.
이어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에 옮겨 이듬해 왕이 또다시 고신 서명을 강요했으나 간관 때의 잘못을 깨달았기 때문에 조서를 받들 수 없다며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견책을 받다가 이내 소환되어 지주사가 되었다. 금나라에서 보낸 양(羊) 중에서 뿔이 4개인 양을 보고 상서롭게 여겨 왕에게 표(表)를 올려 하례하자 사람들이 사각승선(四角承宣)이라 조롱하였다. 또한 관북궁(館北宮)에서 왕과 창화할 때 “공명과 부귀를 모두 꽃 밑의 3배 술잔에 쫓아보냈다(功名富貴盡花下之三盃)”라는 구절이 든 시를 지어 배척당했지만 사람들은 시참(詩讖: 우연히 지은 시가 뒷일과 꼭 맞게 되는 일)이라고 하였다. 친체태묘(親褅太廟) 때 집례(執禮)가 준비되었다고 허위로 보고해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에서 형부상서로 좌천되었다.
1161년 12월 지상서이부사(知尙書吏部事), 이듬해 3월 한림학사를 역임하였다. 1165년 12월 추밀원부사 태자빈객(樞密院副使太子賓客)이 되고 그 뒤 왕의 총신으로 각종 향연에 참석해 창화(唱和)하였다. 이어 동지추밀원사 이부상서(同知樞密院事吏部尙書)를 거쳐 1168년 참지정사 판공부사(參知政事判工部事)로 치사(致仕)하였으며, 1183년(명종 13) 윤11월 세상을 떠났다.
1170년 무신난(武臣亂) 때 화를 모면했으나, 1173년(명종 3) 김보당(金甫當)의 반무인란(反武人亂)으로 다시 문신탄압이 재개되자 불일사(佛日寺)에 숨어 있다가 이의방(李義方)에게 잡혔다. 의종 때에 연복정(延福亭)의 대역사를 일으켰을 때 원망을 사 이의방이 죽이려 하였으나, 문생 문극겸(文克謙)의 힘으로 모면하였다.
1175년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에 오르고 이어 치사하였다. 남의 허물을 용납하지 않는 성품으로 내시 조강실(趙剛實)이 좌창을 관리해 부정을 저지르자 꾸짖었으며, 승(僧) 관원(觀遠)이 대신들과 어울리자 관원을 데리고 온 문극겸을 나무라고 관원을 쫓아버렸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