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군은 고려시대 최씨무신정권기에 조직된 삼별초의 하나이다. 몽골과의 항쟁을 주장한 최항에 의해 몽골군에게 포로로 잡혀갔다가 도망해온 자들을 중심으로 편성되었다. 신의군의 편성으로 야별초의 좌별초·우별초와 더불어 삼별초를 이루었다. 몽고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고 민족의식이 강한 군대였기 때문에 몽골군의 침입에 동원되어 큰 전과를 올렸다. 한편 무인집정과의 연관성이 느슨하였기 때문에 왕정복고의 대의명분에 호응하여 국왕과 연계될 수 있는 부대였다. 최씨무신정권이 몰락한 뒤 김준·임연·임유무 정권 때에도 계속 존속하다가 1270년에 혁파되었다.
신의군은 1257년(고종 44)에 최씨무신정권의 집정자 최항(崔沆)이 죽자 문객(門客)들이 야별초 · 신의군 및 서방(書房) · 도방(都房)을 집합시켜 밤낮으로 지키게 하고 비로소 상(喪)을 발표하였다는 기록에서 처음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신의군의 편성은 1257년 이전인 것이 틀림없으나, 그 시기는 대개 최항의 집정기인 1250년대로 보인다. 당시는 몽고가 대거 침입한 후 철수의 조건으로 강도(江都) 정부의 출륙환도(出陸還都)를 끈질기게 요구하고 있던 때였다.
집권자 최항으로서는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이면 자신의 정권이 몰락하는 것이었으므로 몽고와의 항쟁을 줄곧 주장하여 주전론을 펼쳤다. 이에 몽고군에게 붙잡혀 갔다가 그들로부터 목숨을 걸고 도망해온 장정들을 주축으로 신의군이라는 별초군 부대를 조직하여 몽고와의 항쟁에 박차를 가하였다.
신의군이 편성됨으로써 기존의 좌별초 · 우별초와 더불어 삼별초를 이루었다. 대몽전쟁기의 전 시기를 통해 삼별초는 고려의 가장 강력한 전투 병력이었다. 당시 고려의 군사력으로서는 2군6위의 중앙군이 존재했으나 극히 형식적으로 편제되어 있었고 그 수효가 고려전기에 미치지 못하였다.
또한 최씨무신정권의 순수한 사병집단인 도방 · 마별초의 병력도 존재했으나, 이들 병력은 무인정권을 옹위하였던 반면 대몽전투에 투입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2군6위나 최씨무신정권의 사병은 대몽전투에서 큰 활약을 보이지 못했고 삼별초가 국군에 가까운 기능을 수행하였다.
따라서 삼별초의 하나였던 신의군 역시 강도의 수비를 담당했고, 몽고군의 침입이 있을 때에는 전선에 동원되어 큰 전과를 올렸다. 이러한 강한 군사력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의군은 강화도에서 김준이 최의(崔竩)를 제거했을 때나 홍문계(洪文系) · 송송례(宋松禮)가 임유무(林惟茂)를 제거했을 때 등 주요한 정변(政變)이 있을 때마다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신의군은 야별초에 비해 무인집정과의 연관성이 느슨하고 그 대신 왕정복고의 대의명분에 쉽게 호응하여 국왕과 연계될 수 있는 충성심 강한 부대였다. 신의군 도령낭장(都領郎將) 박희실(朴希實)이 김준과 손을 잡고 최의를 제거한 것이나, 신의군 장군 송분(宋玢)이 국왕 원종의 명령에 의해 최후의 무인집정 임유무를 죽이고 고려무신정권을 종식시킨 것은 그러한 성격을 잘 대변해준다.
신의군이 담당한 도성 수비와 몽고와의 항쟁 등은 비록 최씨무신정권을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나아가서는 고려 정부와 국가의 방어를 담당한 것이므로 공적인 성격을 동시가 갖는 것이었다. 따라서 신의군을 포함한 삼별초는 반관반사(半官半私)의 군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신의군을 포함한 삼별초는 최씨무신정권이 몰락한 뒤 김준 · 임연 · 임유무 정권 때에도 계속 존속하다가 1270년(원종 11)에 혁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