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별초의 설치시기는 최씨정권의 2대 최우가 집권했던 1219년(고종 6) 이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야별초는 처음에 나라 안의 도적을 막기 위해 조직되었으며, 이들이 향촌사회의 치안을 함께 수행했다. 이것은 중앙뿐만 아니라 전국에 걸쳐 치안유지의 공백 상태를 야별초가 대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의 도적이란 비단 남의 물건을 훔치는 자만이 아니라, 최씨정권의 정적 혹은 향촌사회의 저항세력(민란 주동세력)을 동시에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야별초는 관군과 같은 성격을 지닌 최씨정권의 권력 강화의 목적에서 조직되었음을 알 수 있다.
민란 증가와 병행하여 야별초 병력도 증대되어 좌별초(左別抄)와 우별초(右別抄)로 분리되었는데, 이는 최씨정권의 군비 강화와 새로운 군사체계의 정비가 이루어졌음을 뜻한다. 근래 태안 앞바다에서 발굴된 마도3호선에서 나온 목간에 “우삼번별초도령시랑택상(右三番別抄都領侍郞宅上)”이라고 적힌 내용을 통해서, 우별초가 3번으로 세분화되어 있었고 각 번의 최고 지휘관은 도령시랑, 곧 장군이었을 개연성이 높아 보인다. 이것은 야별초가 좌·우별초로 나뉘고 또 우별초 안에서도 3번으로 구분됨으로써 야별초 조직이 상당히 체계적으로 정비되었고 정치적으로도 중요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야별초 조직에 이후 대몽항쟁기 몽골군에게 포로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자들로 조직된 신의군(神義軍)이 더해져 삼별초(三別抄)를 이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