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별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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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무신정권의 최우집권기에 조직한 야별초(夜別抄)의 한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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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 무신정권의 최우집권기에 조직한 야별초(夜別抄)의 한 부대.
내용

좌별초(左別抄)는 우별초(右別抄)와 더불어 야별초를 구성하는 한 부대였다. 본래 야별초는 나라 안의 도적을 엄금하기 위해 조직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도적이란 남의 물건을 훔치는 좀도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최씨정권의 정적 혹은 민란 주동세력, 초적(草賊)을 의미하는 것이다. 향촌사회에서 민란이 증가하여 최씨정권을 위협하자 최우는 야별초를 크게 확대하여 좌·우별초로 분리하여 대응하였는데, 좌별초는 이때 탄생하였다. 이처럼 야별초의 좌·우별초로의 분리시점은 일반적으로 최이집권기로 보나, 충실도감(充實都監) 등의 편제로 미루어 보아 최항집권기 전반부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야별초는 최씨정권의 사병(私兵)처럼 활용되기도 하였지만, 중앙의 치안·형옥(刑獄) 및 대몽전투, 국왕옹위, 수도경비 등 공적인 임무를 자주 수행하였기 때문에 관군(官軍)으로 보기도 한다. 근래 태안 앞바다에서 발굴된 마도3호선에서 나온 목간에 “우삼번별초도령시랑택상(右三番別抄都領侍郞宅上)”이라고 적힌 내용을 통해서, 우별초가 3번으로 세분화되어 있었고, 각 번의 최고 지휘관은 도령시랑, 곧 장군이었을 개연성이 높다. 그렇다면 좌별초도 3번으로 세분화되어 있었고 각 번을 장군이 최고 지휘관으로서 맡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은 야별초 조직이 상당히 체계적으로 정비되었고 정치적으로도 중요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좌·우별초에 대몽항쟁 과정에서 포로로 잡혀갔다가 도망해온 자들로 편성된 신의군(神義軍)을 합하여 흔히 삼별초(三別抄)라 불렀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고려 삼별초의 대몽항쟁』(윤용혁, 일지사, 2000)
『고려의 무인정권』(김당택, 국학자료원, 1999)
『고려무인정권연구』(김당택, 새문사, 1987)
「고려 원종 11년(1270) 삼별초항쟁의 배경」(신안식,『명지사론』13, 2002)
「고려무인정권기의 야별초」(김수미,『고려무인정권연구』, 서강대학교 출판부, 1995)
「별초군의 조직」(김윤곤,『한국사』18, 국사편찬위원회, 1993)
「최씨정권의 지배기구」(민병하,『한국사』7, 국사편찬위원회, 1977)
「고려무인정치기구고」(김상기,『동방문화교류사논고』, 을유문화사,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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