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진양(晉陽). 자(字)는 남로(南老). 아들은 정조(鄭慥)이다.
진양의 향리(鄕吏)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개경으로 올라와 학문을 닦았다. 36세 되던 1125년(인종 3)의 과거 시험에서 병과(丙科)에 합격하였다. 이때 지공거(知貢擧)는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이지미(李之美)였고, 동지공거(同知貢擧)는 지주사(知奏事) 김부일(金富佾)이었다.
처음 금성관기(錦城管記)가 되어 지방으로 나갔다가 임기를 채운 뒤 서울로 돌아와 내시(內侍)에 머물렀다. 이후 제기도감판관(祭器都監判官), 감문위녹사(監門衛錄事), 대관서령(大官署令) 직을 역임하였다. 1142년(인종 20) 지승평군사사(知昇平郡使事)로 복무할 때 청렴함과 관대함을 칭송받아 곧 중서주서(中書注書)로 승진하였다. 이후 권지감찰어사(權知監察御史), 좌정언(左正言), 지제고(知制誥) 등을 거쳐 1147년(의종 1)에는 전라주도안찰사(全羅州道按察使)가 되었다.
의종이 장원궁(長源宮)에 행차하자 좌정언으로서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 문공유(文公裕) 등과 함께 3일 동안 궁궐에 엎드려 국가의 이해에 관련된 일을 간언하였다. 그러나 국왕의 미움을 받아 시상의봉어(試尙衣奉御)로 좌천되었다가, 용주방어사(龍州防禦使)로 외직(外職)에 나아갔다. 수 차례의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상심한 채 병을 얻어 1149년(의종 3)에 6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해 8월 개성 북촌(北村) 산기슭에 장례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