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개성(開城). 증조는 양양공(襄陽公) 왕서(王恕), 조부는 시안공(始安公) 왕인(王絪)이고, 아버지는 서원후(西原侯) 왕영(王瑛)이다. 서흥후(瑞興侯)에 봉작되었다.
1301년(충렬왕 27) 2월에 원(元)에 가서 주2. 이때는 공주와의 불화로 인한 여러 사건으로 충선왕(忠宣王)이 폐위되고 충렬왕(忠烈王)이 복위한 시기로, 충렬왕 지지 세력인 왕유소(王惟紹)· 송방영(宋邦英) 등은 왕전을 충선왕비 주1와 혼인하게 하여 충렬왕의 뒤를 잇도록 할 것을 도모하였다. 같은 해 5월 지도첨의사사(知都僉議司事) 민훤(閔萱)을 원에 보내어 공주의 개가(改嫁)를 청하는 표문(表文)을 바치게 하였으나, 민훤이 이를 제출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1303년(충렬왕 29), 충렬왕은 당시 원에 있던 충선왕이 고려로 돌아오는 것을 막고, 또 공주를 왕전에게 개가시키는 것을 청하기 위해 직접 원으로 갔다. 이때 충렬왕의 지지 세력이 다수 왕을 호종하였고, 이에 충선왕 또한 자신의 지지 세력을 원에 들어오게 하여 이후 원에서 양왕세력(兩王勢力) 간에 정쟁(政爭)이 이어진다. 1306년(충렬왕 32) 당시 왕유소 등은 원 성종(成宗)의 황후(皇后) 불루간 카툰[卜魯罕可敦] 및 좌승상(左丞相) 아쿠다이[阿忽台]와 평장(平章) 바두마신[八都馬辛] 등에게 충선왕을 참소(讒訴)하고 공주의 개가를 추진하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 원에 있던 최유엄(崔有渰)이 충렬왕에게 간곡하게 간언하고, 홍자번(洪子藩) 등이 원 중서성(中書省)에 나가 왕유소 등의 처벌을 요구함으로써 일이 중지되었다.
당시 원에서는 1307년(충렬왕 33) 2월 성종이 사망하면서 제위(帝位) 계승 분쟁이 발생하였는데, 이때 충선왕은 폐위 후 연경(燕京)에서 숙위(宿衛) 생활을 하면서 친분을 쌓은 무종(武宗) 카이샨[海山] 옹립에 공을 세워 권력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에 같은 해 4월, 왕 부자를 이간하던 왕유소·송방영은 처형되었으며, 충선왕은 왕전을 용서하려고 하였지만 왕전 또한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