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개성(開城). 충선왕(忠宣王)의 셋째 아들로, 몽골명은 타스테무르[탑사첩목아(塔思帖木兒)]이다.
충선왕이 내쫓은 궁인(宮人)이 백문거(白文擧)와 결혼 후 낳았다고도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일찍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가 1351년(충정왕 3)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하자, 원(元)으로 도망하였다.
1362년(공민왕 11) 원에서 공민왕을 폐위하고 그를 대신하여 덕흥군(德興君)을 고려 국왕에 세우고자 하였다. 원 황제가 참소를 듣고 행한 일이라 하는데, 이는 원 순제(順帝)의 황후인 기황후(奇皇后)의 원한과 관련된다. 앞서 1356년(공민왕 5)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奇轍) 및 원 황제와 황태자에게 딸을 보내며 기씨(奇氏) 일가를 중심으로 결집했던 노책(盧頙)· 권겸(權謙) 등이 공민왕에 의해 주살되었는데, 이에 원한을 품고 있던 기황후가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고려가 불안정해진 틈을 타서 공민왕을 폐위하려 한 것이었다. 1363년(공민왕 12) 12월, 원에서는 덕흥군을 고려 국왕으로 삼고, 기씨의 일족인 기삼보노(奇三寶奴)를 그 원자(元子)로, 최유(崔濡)를 승상으로 삼아 요양(遼陽)의 군사 1만을 거느리고 고려로 가게 하였다. 최유는 고려인으로, 당시 원에 있으면서 기황후를 부추겨 공민왕을 폐위하게 한 인물이다. 덕흥군이 이끄는 군대는 이듬해 정월 의주(義州)를 점령하고 남하하려다가, 수주(隨州: 현, 평안북도 정주)의 달천(獺川)에서 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 등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패해 원으로 돌아갔다.
이후 공민왕은 덕흥군을 고려로 압송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원에서는 황제가 그를 장(杖) 107대를 친 후 고려로 돌려보내라고 하였으나 등창이 났으니 낫기를 기다려 장을 쳐서 보내겠다고 답하였다. 결국 덕흥군은 고려로 압송되지 않았고, 장형(杖刑)에 처해졌는지의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1377년(우왕 3) 안주(安州)에서 승려 달명(達明)이 덕흥군의 아들임을 자칭하면서 반역을 꾀했다가 잡혀 죽은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