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3년(충숙왕 복위 2) 원의 휘정원사(徽政院使) 독만질아(禿滿迭兒)의 추천으로 궁녀가 되었다. 순제가 총애하므로 권신 엘테무르[燕帖木兒]의 딸로서 순제의 정후(正后)였던 타나시리[答納失里]가 시기하여 고초를 겪었다. 1335년(충숙왕 복위 4) 타나시리의 일족이 정계에서 축출되자 그를 황후로 책봉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바얀[伯顔] 등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1339년 황자 아유시리다라[愛猶識理達臘]를 출산하고, 이듬해 2월에 바얀 세력이 물러난 후 4월에 제2황후로 책봉되었다.
황후가 된 뒤 곧 반대 세력을 몰아내고, 휘정원을 자정원(資政院)으로 이름을 바꾸어 이를 배경으로 막대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1355년(공민왕 4) 그 아들 아유시리다라에 대한 황태자 책봉이 이루어졌으나, 이듬해 정월 순제의 양위(讓位)를 통해 아들을 황제위에 올릴 것을 시도하였다.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지만 원 조정에서 기황후가 그 세력을 강화해 감에 따라 이를 배경으로 그 일족인 기씨(奇氏) 일가가 고려에서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 오빠인 기철 등이 권세를 휘두르다가 1356년(공민왕 5) 공민왕(恭愍王)에게 주살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고 있던 기황후는 이후 1361년(공민왕 10)의 홍건적(紅巾賊) 침입으로 고려가 혼란한 틈을 타 공민왕을 폐위하고 충선왕(忠宣王)의 얼자(孼子)인 덕흥군(德興君) 타스테무르[塔思帖木兒]를 고려왕으로 세우고자 하였다. 1364년(공민왕 13) 몽골에 있던 고려인 최유(崔濡)가 원의 군사 1만을 끌고 덕흥군과 그 원자(元子) 기삼보노(奇三寶奴)를 호위하고 고려를 침공해 왔으나 고려군에게 패주하였다.
기황후는 쿵크라트 출신 정후와 그 어린 아들이 있는 상황에서 자신의 아들이 황태자임에도 불구하고 황제위에 오르지 못하게 될 것을 우려하여, 1356년 이후로도 1360년(공민왕 9) 무렵 및 1365년(공민왕 14) 두 차례에 걸쳐 그 아들에 대한 선위(禪位)를 시도하였다. 1365년 제1황후가 사망한 후 기황후가 제1황후에 오르게 된 후에는 더 이상 선위를 시도하지 않았다.
1368년(공민왕 17) 주원장(朱元璋)의 군대가 대도(大都)를 점령하자 순제와 함께 응창(應昌)으로 물러났다. 이후의 행적이 권형(權衡)의 『경신외사(庚申外史)』에 실려 있으나, 그 마지막은 알 수 없다. 1370년(공민왕 19) 순제가 사망한 후 그 아들이 황제위를 계승했으니, 그가 소종(昭宗)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