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공주로, 몽골명은 쿠틀룩케르미쉬[忽都魯揭里迷失]다. 아버지는 원(元) 세조(世祖) 쿠빌라이[忽必烈], 어머니는 아속진(阿速眞) 카툰[可敦]이다. 충선왕(忠宣王)의 어머니이다.
1269년(원종 10) 당시 세자였던 충렬왕(忠烈王)이 부왕인 원종(元宗)이 폐위된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 청혼하여, 1274년(원종 15) 5월 충렬왕이 세자로서 원에 있을 때 혼인하였다. 같은 해 충렬왕이 즉위하자 충렬왕에 이어 고려에 왔다. 이때 충렬왕은 서북면(西北面)에 행차해 공주를 맞이하였고, 비빈(妃嬪)과 모든 궁주(宮主) 및 재추(宰樞)의 부인으로 하여금 주1 하였으며, 재추와 백관(百官)은 국청사(國淸寺)의 문전에서 맞이하였다.
1275년(충렬왕 1) 정월 원성공주(元成公主)에 책봉되어 궁(宮)의 이름은 경성(敬成), 전(殿)의 이름은 원성(元成), 부(府)의 이름은 응선(膺善)이라 하고 관속(官屬)을 두었다. 안동부(安東府)와 경산부(京山府, 현, 경상북도 성주군)를 주2으로 삼았다. 같은 해 아들을 낳으니, 이가 훗날의 충선왕이다. 공주에 앞서 충렬왕과 결혼하여 아들을 두기도 하였던 정화궁주(貞和宮主)가 공주의 출산을 축하하는 연회를 열었는데, 당시 자리 문제로 공주가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듬해 정화궁주가 공주를 저주했다는 무고(誣告)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러한 일련의 사건은 공주가 자신의 위상을 드러내고자 하는 목적에서 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몽골의 공주로서 위세를 떨치기도 하였으나, 고려에 체재하면서 충렬왕과 갈등했던 다루가치[達魯花赤] 흑적(黑的)이 귀국하려 하자 그가 원에 가서 고려를 모함할 것을 우려하여 왕과 함께 그를 만류하기도 하였다. 충렬왕이 측근을 대동하고 사냥을 일삼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였는데, 이후 아들 충선왕은 이러한 충렬왕의 행실이 공주가 병에 걸려 결국 주3 되는 배경이 되었다고 여겨, 그 역시 아버지의 정치에 비판적 태도를 취하게 된다.
1294년(충렬왕 20) 6월에 원 성종(成宗)이 그를 안평공주(安平公主)로 책봉하였다. 1296년(충렬왕 22) 원에 가서 아들 충선왕의 결혼식에 참석한 뒤 1297년(충렬왕 23) 5월에 귀국하였다. 곧이어 병에 걸려 현성사(賢聖寺)에서 사망하였다.
1297년 9월 고릉(高陵)에 장사지냈으며 시호를 장목인명왕후(莊穆仁明王后)라고 하였다. 1298년(충렬왕 24) 충선왕이 즉위해 인명태후(仁明太后)라고 추존(追尊)하였고, 원 무종(武宗)이 황고제국대장공주고려국왕비(皇姑齊國大長公主高麗國王妃)라고 추봉(追封)하였다. 1302년(충렬왕 28) 10월에 안평공주의 주4을 묘련사(妙蓮寺)에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