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에는 ‘몽고녀(蒙古女)’라고만 되어 있으나, ‘공주’라는 칭호와 이제현(李齊賢)의 『익재난고(益齋亂藁)』 「충헌왕세가(忠憲王世家)」를 통해 그가 몽골 황제 성종(成宗)의 조카 위왕(魏王) 아무가[阿木哥]의 딸임을 알 수 있다. 충숙왕비(忠肅王妃)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와 자매간이다. 몽골 이름은 백안홀도(伯顔忽都)이다.
충숙왕(忠肅王)이 원(元)나라에 있을 때 결혼하여 1333년(충숙왕 복위 2) 왕과 함께 고려로 돌아왔다.
1336년(충숙왕 복위 5) 경화부(慶華府)를 설치하고 관속(官屬)을 두었다. 1339년(충숙왕 복위 8) 충숙왕이 죽자 전왕(前王) 충혜왕(忠惠王)이 공주를 위해 영안궁(永安宮)에서 향연을 베풀었다. 이에 공주가 답례로 향연을 베풀었는데, 주연이 파하자 왕은 취한 체하고 공주를 겁간하였다. 공주가 이를 치욕스럽게 여겨 원에 돌아가려고 말을 사려 하였으나, 왕이 마시(馬市)를 금하여 말을 살 수 없었다. 이에 공주가 겁간당한 사실을 심왕(瀋王) 세력인 조적(曺頔)에게 말하니, 조적 일당은 충혜왕을 원 조정에 고소하고 이를 구실 삼아 심왕을 옹립하기 위하여 난을 일으켰다.
조적의 난(曹頔의 亂)은 실패로 돌아가고 조적이 죽음을 당하였으나, 원에서 사신 두린(頭麟) 등을 보내어 충혜왕과 그 측근을 압송해 가니, 공주는 충혜왕의 폐신(嬖臣)이었던 찬성사(贊成事) 정천기(鄭天起)를 정동성(征東省)에 가두고, 김지겸(金之謙)을 권정동성(權征東省)에, 김자(金資)를 제조도첨의사사(提調都僉議司事)에 임명하였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에 사망하였다.
1367년(공민왕 16) 원에서 숙공휘령공주(肅恭徽寧公主)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