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화공주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 제27대 충숙왕의 왕비.
이칭
시호
숙공휘령공주(肅恭徽寧公主)
성명
백안홀도(伯顔忽都), 바얀쿠투
인물/전통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344년(충목왕 즉위년)
출생지
몽골
관련 사건
조적의 난(曹頔의 亂)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경화공주는 고려 제27대 충숙왕의 왕비이다. 충숙왕이 복국장공주(濮國長公主)와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 사후에 그에 이어 세 번째로 맞이한 몽골공주 출신 왕비다. 충숙왕 사후 충혜왕에게 겁간을 당해 조적의 난이 발생하는 데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에 사망하였다.

정의
고려, 제27대 충숙왕의 왕비.
가계 및 인적사항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에는 ‘몽고녀(蒙古女)’라고만 되어 있으나, ‘공주’라는 칭호와 이제현(李齊賢)『익재난고(益齋亂藁)』 「충헌왕세가(忠憲王世家)」를 통해 그가 몽골 황제 성종(成宗)의 조카 위왕(魏王) 아무가[阿木哥]의 딸임을 알 수 있다. 충숙왕비(忠肅王妃) 조국장공주(曹國長公主)와 자매간이다. 몽골 이름은 백안홀도(伯顔忽都)이다.

주요 활동

충숙왕(忠肅王)이 원(元)나라에 있을 때 결혼하여 1333년(충숙왕 복위 2) 왕과 함께 고려로 돌아왔다.

1336년(충숙왕 복위 5) 경화부(慶華府)를 설치하고 관속(官屬)을 두었다. 1339년(충숙왕 복위 8) 충숙왕이 죽자 전왕(前王) 충혜왕(忠惠王)이 공주를 위해 영안궁(永安宮)에서 향연을 베풀었다. 이에 공주가 답례로 향연을 베풀었는데, 주연이 파하자 왕은 취한 체하고 공주를 겁간하였다. 공주가 이를 치욕스럽게 여겨 원에 돌아가려고 말을 사려 하였으나, 왕이 마시(馬市)를 금하여 말을 살 수 없었다. 이에 공주가 겁간당한 사실을 심왕(瀋王) 세력인 조적(曺頔)에게 말하니, 조적 일당은 충혜왕을 원 조정에 고소하고 이를 구실 삼아 심왕을 옹립하기 위하여 난을 일으켰다.

조적의 난(曹頔의 亂)은 실패로 돌아가고 조적이 죽음을 당하였으나, 원에서 사신 두린(頭麟) 등을 보내어 충혜왕과 그 측근을 압송해 가니, 공주는 충혜왕의 폐신(嬖臣)이었던 찬성사(贊成事) 정천기(鄭天起)를 정동성(征東省)에 가두고, 김지겸(金之謙)을 권정동성(權征東省)에, 김자(金資)를 제조도첨의사사(提調都僉議司事)에 임명하였다.

1344년(충목왕 즉위년)에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1367년(공민왕 16) 원에서 숙공휘령공주(肅恭徽寧公主)라는 시호를 추증하였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단행본

김창현, 『고려의 여성과 문화』 (신서원, 2007)

논문

김혜원, 「고려후기 심왕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9)
이명미, 「고려·원 왕실통혼의 정치적 의미」 (『한국사론』 49,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2003)
森平雅彦, 「高麗王家とモンゴル皇族の通婚關係に關する覺書」 (『東洋史硏究』 67-3, 東洋史硏究會, 2008)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