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1년(고종 18) 인주의 신기도령(神騎都領)으로 있으면서 몽골이 침략해 오자 편민(編民) 1,500호(戶)를 이끌고 투항하였다. 그 뒤 고려군민만호(高麗軍民萬戶)에 제수되었고, 몽골의 길잡이가 되어 고려를 침공하는 데 앞장섰다.
몽골이 북계(北界)의 40여 성(城)을 함락시킨 뒤에는 이곳을 진수(鎭守)하였다. 그리고 고려의 항복을 종용하는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1232년(고종 19) 고려의 강화천도(江華遷都)에 대한 보복으로 살례탑(撒禮塔)[몽골명: 살리타이, 사르타이]가 침공해오자 북계(北界)를 근거지로 해서 협력하였다.
살례탑이 처인성(處仁城: 현, 경기도 용인시)에서 사살당하고 몽골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고려로부터 서경낭장(西京郎將)에 임명되어 북계에 대한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였다. 1233년(고종 20) 필현보(畢賢甫)와 함께 정부에서 파견한 선유사(宣諭使) 정의(鄭毅) 등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북계병마사(北界兵馬使) 민희(閔曦)에게 토벌되었다. 필현보가 죽임을 당하자, 몽골로 도망해 요양(遼陽)·심양(瀋陽) 등지에 거처하였다. 이때 몽골로부터 관령귀부고려군민장관(管領歸附高麗軍民長官)에 임명되었다.
이후 요양 등지에서 전쟁 중에 몽골에 투항하였거나 유망(流亡)해 간 고려인들을 통치하였다. 또 이들을 이용하여 몽골의 고려 침략에 합세해 1235년(고종 22)·1245년(고종 32)·1253년(고종 40)·1254년(고종 41)·1258년(고종 45)의 다섯 차례에 걸쳐 고려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뚤루게[禿魯花: 볼모]로 몽골에서 머물던 영녕공(永寧公) 왕준(王綧)과 귀부 군민에 대한 통치권을 둘러싸고 대립하다가 1258년에 죽임을 당하였다.
홍복원의 후손들은 계속해서 요양, 심양 지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유지하면서 고려와 대립하였다.
아들 홍차구와 홍군상이 몽골에서 관인으로 출세함으로써 가의대부 심양후(嘉議大夫瀋陽侯)로 증직(贈職)되었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