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방 ()

목차
관련 정보
조선시대사
제도
고려 · 조선시대에 매(鷹)의 사육과 사냥을 맡은 관서.
내용 요약

응방은 고려·조선시대에 매(鷹)의 사육과 사냥을 맡은 관서이다. 매사냥을 즐기는 몽골에서 들어온 제도로 1275년에 처음 설치되었다. 응방은 궁궐 안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설치되었는데, 특히 함경도 지방은 해동청(海東靑)의 산지로서 중시되었다. 응방의 횡포와 폐해로 인해 치폐를 거듭하다가 창왕 때에 폐지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395년에 설치되었다. 연산군 때에 갑사·정병 400인을 두었으며, 내금위 70인, 겸사복 10인을 보내어 매를 잡게 하는 등 민폐가 많았다. 응방을 폐지하자는 논의가 계속되다가 1715년에 완전히 혁파되었다.

목차
정의
고려 · 조선시대에 매(鷹)의 사육과 사냥을 맡은 관서.
내용

응방의 제도는 몽고에서 들어온 것으로, 우리 나라에 처음 설치된 때는 1275년(충렬왕 1)이고, 1281년 응방 도감(都監)으로 제도화되었다. 원래 매사냥은 수렵과 목축을 업으로 하는 북방 민족과 중국 대륙에서 일찍부터 행해졌다. 특히 매사냥을 즐긴 몽고인들에게 매는 중요한 재산이었다. 고려의 응방은 몽고의 매 요구에 대한 대책으로 설치되었다는 면이 있다. 그러나 몽고의 주1 및 귀족 사회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던 매사냥의 풍습을 좋아한 충렬왕의 기호에서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응방의 조직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 왕 직속 하에 응방사(鷹坊使) · 왕지사용별감(王旨使用別監) · 착응별감(捉鷹別監) · 응방심검별감(鷹坊審檢別監) 등을 두어 각지의 응방을 관장하다가, 충선왕 때에 응방사(종3품) · 부사(副使, 종4품) · 판관(判官, 종4품) · 녹사(錄事) 각 2인을 두었다. 응방은 궁궐 안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설치되었는데, 특히 함경도 지방은 해동청(海東靑)의 산지로서 중시되었다.

한편, 죄를 지었거나 요역과 주2을 피하여 도망해온 자를 모아 촌락을 이루어 ‘이리간(伊里干)’이라 칭하고 응방에 속하게 하였는데, 이들의 횡포가 매우 심하였다. 응방은 매의 나포 · 사육은 물론, 주3에 헌응(獻鷹)과 왕의 사냥행사에의 참가를 직무로 하였을 뿐 아니라 왕과 왕비에게 자주 향연을 베풀어 총애를 받기도 하였다.

고려의 응방은 몽고와 같이 면역 · 면세의 특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경제적 기반으로 많은 사전(賜田)을 받았고 노비와 소작인을 거느렸다. 당시 응방의 횡포와 폐해는 극심한 것이어서 그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일어나 여러 차례의 주4를 거듭하였다. 1288년과 1309년(충선왕 1)에 잠시 폐지하였다가 다시 설치하였고, 충목왕 때 다시 폐지되면서 응방에 속했던 전토(田土)와 노비를 각각 본처(本處)에 환원시켰다. 1372년(공민왕 21)에 다시 설치되었으나, 창왕 때에 아주 폐지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1395년(태조 4)에 처음 설치되어 응사(鷹師) · 패두(牌頭) 2인을 두었다. 또 좌 · 우응방도 두었는데, 그 설치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 뒤 1466년(세조 12) 좌 · 우응방을 혁파하였다가 다시 설치하였다. 1473년(성종 4)에 다시 혁파하였다. 좌우응방은 연산군 때 다시 설치되어 각각 갑사(甲士) · 정병(正兵) 400인을 두었으며, 또 내금위(內禁衛) 70인, 겸사복(兼司僕) 10인을 보내어 매를 잡게 하는 등 민폐가 많았다.

응방을 폐지하자는 논의가 계속되다가, 1517년(중종 12) 검토관 최산두(崔山斗)가 각 도의 매 진상에 따르는 폐단을 논하고 없앨 것을 주장하자 남쪽 지방만 폐지하고 주5는 그대로 두었다. 내시부(內侍府)의 관원으로는 상책(尙冊, 종4품) · 상호(尙弧, 정5품) 등이 응방에 딸려 있었다. 1715년(숙종 41)에 완전히 혁파되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원(元)의 정치적 간섭과 고려정부의 대응」(장동익, 『역사교육논집』 17, 1992)
「고려응방고(高麗鷹坊考)」(정진우, 『청대사림』3, 1979)
「高麗時代の鷹坊に就いて」(內藤雋輔, 『朝鮮學報』 8, 1955 ; 『朝鮮史硏究』, 1961)
주석
주1

황제의 집안. 우리말샘

주2

세금 따위를 거두어들이는 일. 우리말샘

주3

1271년에 몽고 제국의 제5대 황제 쿠빌라이가 대도(大都)에 도읍하고 세운 나라. 1279년에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국 본토를 중심으로 몽고, 티베트를 영유하여 몽고 지상주의 입장에서 민족적 신분제를 세웠으나 1368년에 주원장을 중심으로 한 한족의 봉기로 망하였다. 우리말샘

주4

설치와 폐지 우리말샘

주5

고려ㆍ조선 시대에 군사적으로 중시되던 동계(東界)와 서계(西界)를 아울러 이르던 말. 동계는 함경도와 강원도의 일부 지역에, 서계는 평안도 지역에 해당된다. 우리말샘

집필자
김성준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