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산두는 조선 전기 중종 대 홍문관 수찬, 사간원 정언, 사헌부 헌납 등을 역임한던 문신이다. 기묘명현 중 한 명으로 젊어서부터 조광조·김정·김안국 등과 교류가 있었다. 학문 수준과 도덕성에 대한 주변 사대부들의 평가가 높았으며, 김인후·유희춘 등과 같은 인물들이 찾아와서 글을 배울 정도였다. 중종 대 문과 별시에 합격해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했지만 가문이 한미했다는 이유로 홍문관 관원 임명에 대한 반대를 겪었다. 기묘사화 당시 조광조의 붕당으로 몰려 탄핵되어 유배를 갔다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방면되었다.
최산두(崔山斗)는 1483년(성종 14) 태어났다. 본관은 광양(光陽), 자는 경앙(景仰), 호는 신재(新齋) · 농중자(籠中子) · 나복산인(蘿葍山人)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최기연(崔寄淵), 할아버지는 최사문(崔思文)이다. 아버지는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낸 최한영(崔漢榮)이다. 어머니 청주한씨(淸州韓氏)는 교리(校理) 한경회(韓敬澮)의 딸이다. 부인 이천서씨(利川徐氏)는 서극수(徐克綏)의 딸이다. 최산후(崔山厚)가 동생이다.
최산두는 18세부터 조광조(趙光祖) · 김정(金淨) · 김안국(金安國) 등과 교유하였다고 한다. 1504년(연산군 10)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1513년(중종 8)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홍문록(弘文錄)에 올랐지만 출신이 한미하다는 이유로 일부 대간들이 홍문관 관원 임명에 반대하였다. 최산두의 가문이 한미한 것이 문제가 되었지만, 그의 학문 수준과 덕행은 모두가 인정하고 있었다. 중종은 결국 홍문관 관원으로 임명하였다.
관직 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부터 학문과 인품으로 높을 평가를 받아 김인후(金麟厚) · 유희춘(柳希春) 등이 찾아와서 글을 배웠다고 한다. 이후 홍문관 수찬을 거쳐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 사헌부 헌납 등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조광조의 붕당(朋黨)으로 몰리면서 탄핵당해 유용근(柳庸謹) · 정응(鄭譍) · 정완(鄭浣) 등과 함께 유배되었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방면되었다. 1536년 54세의 나이로 죽었다. 1538년 직첩(職牒)을 돌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