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완(鄭浣)은 1473년(성종 4)에 태어났다. 본관은 연일(延日)이며, 자는 신지(新之), 호는 겸재(謙齋)이다. 증조할아버지 정헌대부(正憲大夫) 병조판서를 지낸 정연(鄭淵), 할아버지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전주부윤(全州府尹)을 지낸 정자제(鄭自濟), 아버지는 남부참봉(南部參奉)을 지낸 정진(鄭溱)이다. 어머니 파평윤씨(坡平尹氏)는 배천군수(白川郡守) 윤우(尹遇)의 딸이다. 영일현(迎日縣, 지금의 경상북도 포항 지역에 있었던 옛 지명) 출신으로 선대부터 이 지역에서 생활하였다.
1504년( 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아버지가 화를 당해 사망하면서 정완도 영천(永川)으로 유배되었다. 중종 즉위 이후 방면되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1507년(중종 2) 사마시(司馬試)에 입격하였다. 공부하는 동안 김식(金湜)과 막역한 사이로 지냈다. 1514년 선릉(宣陵) 참봉(參奉)으로 천거되었으나 어머니 봉양 문제 때문에 사양하였다. 1518년 조정의 천거를 통해 조지서(造紙署) 사지(司紙)에 임명되었다.
다만,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의 1516년 기록에 정완이 사축서(司畜署) 사축(司畜)으로 지칭되어 있고, 재행(才行)으로 탁용되었다는 서술이 있다. 이를 통해 미루어 볼 때 천거를 통한 관직 생활은 1516년부터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518년 대간으로 임명되었다. 천거를 통해 6품직을 제수받은 이를 근무 기간을 고려하지 않고 대간으로 임명하는 조치를 반대하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하지만 중종은 이전에도 있었던 사례라는 점을 강조하며 그를 대간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예조정랑(禮曹正郎)과 이조정랑(吏曹正郎) 등을 지냈다. 1521년(중종 16) 49세로 병사하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정완에 대한 평가나 서술은 재행을 인정할 뿐, 능력과 도덕성은 대체로 부정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만,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등에서는 그의 학식과 인품을 높게 평가하고 있으며, 관직 생활 중 탄핵을 받았던 일을 일부 간신들의 모함으로 설명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죄를 입어 직첩(職牒)이 회수되었지만, 1538년 중종의 조치로 직첩을 돌려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