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응지(譍之), 호는 소우당(素愚堂). 정효경(鄭孝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수(鄭穗)이고, 아버지는 돈녕부정 정인후(鄭仁厚)이다. 어머니는 최순(崔洵)의 딸이다.
1507년(중종 2) 사마시에 합격한 뒤 151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홍문관정자에 초수(初授)되었다. 1516년 김정(金淨)·신광한(申光漢)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일으키기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한 뒤 전경·저작·박사를 역임하였다.
이어 경연사경(經筵司經)에 재임 중 내수사(內需司) 장리(長利)의 혁파 등 구제(舊制)의 혁파를 주장하였다. 이어 홍문관수찬에 승보(陞補)되었고, 사간원정언으로 대사헌 이행(李荇)을 탄핵하여 면직하게 하였다.
그 뒤 예조·병조의 좌랑을 거쳐 홍문관교리에 임명되었다. 1518년 지평으로 전보되었는데, 이 때 훈구파로부터 조광조(趙光祖)를 영수로 하는 사림파로 지목되어 모함을 받기도 하였다. 같은 해에는 성리학의 이론서인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진강(進講)할 수 있는 인물로 추천되었다.
그 뒤 헌납을 거쳐 1519년 이조정랑을 역임한 뒤 홍문관응교를 거쳐, 전한 겸 예문관응교로 발탁되었다. 그 해 겨울 훈구파인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에 의해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의 무죄를 주청하였다. 그러나 결국 이에 연루되어 부여로 유배당했고, 1522년 적소에서 33세로 죽었다.
사림파의 영수인 조광조로부터 크게 쓰일 인물로 촉망을 받았다. 기묘사화 이전의 개혁정치 시기에 사림파로서 전통적 명분의 회복, 새로운 통치 질서의 수립 등에 기여한 바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