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周)나라의 봉건 지배 체제에서 제후가 왕을 뵙고 예물을 바치는 의식에서 시작되었다. 주나라는 국왕이 직할지를 다스리고, 나머지 지역은 공신이나 왕의 친인척 등에게 분봉(分封)하여 각각 다스리게 하였다.
국왕 입장에서는 각 지역을 다스리는 제후들과의 신속(臣屬)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중요했으므로 제후들이 특정 시기에 각 지방의 특산품들을 가지고 왕을 찾아와 인사하게 하였는데, 이 의식을 조공이라고 하였다. 제후가 왕을 찾아뵙는 정치적 의식을 조근(朝覲), 공물을 바치는 경제적 행위를 입공(入貢)이라 하였으니, 조공(朝貢)은 정치적 경제적 행위가 합쳐진 용어이다.
그 뒤 한(漢)나라 시기 천하관(天下觀)이 확대되면서 황제가 다스리는 천하(天下) 범위도 중국 국내를 넘어 외국과의 관계로 확장되었다. 조공은 시기에 따라 변천을 거치며, 중국이 주변국과의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중국 주변 국가들이 조공 방식을 차용하거나 변용해서 다른 주변국과의 관계에 적용하기도 하였다. 고구려가 중국에 조공하면서 다른 주변국에게 조공을 받았다는 점이 그 하나의 예이다.
조공 개념은 1940~1960년대 미국의 페어뱅크(John K. Fairbank)를 필두로 한 소위 하버드학파로 불리는 학자들이 연구하면서 주목되었다. 페어뱅크의 관심은 ‘근대’에 있었기 때문에, 주로 청대(淸代) 동아시아 국제 질서를 관찰하여 ‘중국적 세계 질서(Chinese World Order)’와 ‘조공체제(tributary system)’라는 이론을 도출하였고, 이를 이전 시기로 확대 적용하였다. 그들이 주장한 조공 질서는 세계 학계에 널리 수용되어, 다양한 비판을 받았음에도 현재까지 통설의 위치를 잃지 않고 있다.
존 페어뱅크는 "조공체제(Tributary system)는 세계를 문명(華)과 야만(夷)으로 구분하는 고대 중국인들의 문화적 우월주의에 기반하며, 전근대 동아시아의 유일한 국제 질서"라고 규정하였다. 이 중국적 질서는 아편전쟁으로 대표되는 19세기 서양 세력의 진입으로 인해 붕괴되고, 아시아는 드디어 만국 공법에 기초한 서양식 조약체제(Treaty system)로 편입되었다고 설명하였다.
아편전쟁을 통해 ‘전통적’ 중국이 비로소 정체 상태에서 깨어나 ‘근대사회’로 진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페어뱅크는 동아시아에서는 엄밀한 의미의 외교, 즉 주권국들 사이의 동등한 접촉이 존재하지 않았다고까지 말하였다. 이러한 주장의 근저에는 형식적으로는 평등 관계에 기초한 유럽 외교의 우수성(조약체제)과, 중국을 중심으로 수직적 질서로 편제되어 있던 아시아의 후진성(조공체제)을 대비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
더욱이 페어뱅크는 주로 중국 청대 사료를 분석하여 조공체제를 설명하였기 때문에 그보다 앞선 시기인 고대 동아시아를 설명하기에는 맞지 않는 점이 있으며, 중국 외 주변국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한계를 지적받고 있다. 또한 페어뱅크는 역사가 현실 문제에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정치적 신념이 있어서,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냉전 시기에 미국의 아시아 정책을 고려하여, 전근대 중국사를 재단하려 하였다는 비판도 받았다.
조공은 외형적으로 군신(君臣) 관계라고 하는 상하 관계를 띠고 있는 예법 질서이다. 그러다보니 조공의 형식적인 측면만 주목하여 서구 제국주의처럼 조공 관계를 지배와 종속(제국-식민지) 관계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렇지만 전근대 동아시아에서 조공은 당사자 양자가 이익을 고려한, 합목적적인 외교적 정치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의 황제는 하늘의 아들이라는 의미로 천자(天子), 즉 천하를 다스리는 세계의 중심으로 자처하였기 때문에 여러 외국 사신들이 자신을 찾아와 천자로 인정하는 의식이 중요하였다. 중국의 주요 공식 행사에 여러 외국 사신들이 황제에 인사〔하례(賀禮)〕하는 행위는 천자인 황제의 존엄과 권위를 세우는 상징적인 정치 예식이었다.
한편 주변국의 입장에서는 조공을 선택한 의미가 지역과 시기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한반도의 경우에는 조공 관계를 통해 국경을 맞대고 있는 거대 제국 중국에게서 국가 안보를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였고, 경제대국인 중국과 무역할 수 있는 권리도 확보할 수 있었다.
흉노나 몽골 등의 중앙아시아 및 북방 민족, 그리고 아랍이나 일본 등 중국과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들은 조공을 경제적 측면으로 여기는 경향이 강했다. 이 때문에 일본학계에서는 특히 명 · 청시대 조공 관계의 본질을 조공 무역, 즉 경제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당시에 일본 등의 외국은 명나라에 더 자주 조공하여 무역의 기회를 더 많이 얻고 싶어 하였지만, 명나라는 오히려 외국의 잦은 조공이 자국 경제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 조공 횟수를 줄이고 감합(勘合)과 법 규정까지 만들며 외국이 자주 조공하지 못하도록 규제하였다. 한편 고대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여러 패권국들이 경쟁할 때 조공을 통해 주변국과의 결속을 다짐하고 후원을 약속하기도 하였다.
요컨대 전근대 동아시아의 조공 관계는 서구 제국주의가 강력한 군사력을 통해 다른 국가를 침략하여 식민지로 삼아, 정치적 경제적으로 지배하고 수탈했던 방식과 다르다. 화이(華夷) 질서를 토대로 중국 중심의 세계관 속에서 만들어진 타민족 · 타지역과의 교섭-공존 방식으로서의 외교 형태라 할 수 있다.
『주례(周禮)』에서 조공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면, 천하는 천자가 다스리는 곳을 중심으로 5개[오복(五服)]의 지역으로 구분된다. 제일 가까운 후복(侯服)은 매년 천자를 찾아뵈며 공물을 바쳐야 하고, 두 번째 기복(甸服)은 2년에 한 번씩, 그 다음 남복(男服) · 채복(采服) · 위복(衛服) 등도 3년, 4년, 5년에 한 번씩 조공해야 하였다. 중앙에서 멀어질수록 천자의 교화가 덜 미치고 조공 주기도 길어지는데, 경전에서 설명하는 조공의 주기성이 현실에서 곧바로 실현되지는 않았다.
한국 역사에서는 고조선-한나라 시기부터 조공 관계의 모습이 확인된다. 삼국(三國) 중에서는 고구려가 중국 왕조에 사신을 가장 자주 파견한 것으로 확인되는데, 매년 정기적으로 특정 절일에 맞추어 파견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우호 관계를 확인하는 차원에서 사신을 파견하였지만 조공이 의례화되었다고 보기 어려우며, 백제의 사신 파견 횟수는 고구려보다 현저히 적었다. 신라는 주변국들 가운데 당(唐)나라에 가장 많은 사신을 파견하였지만, 정기적 사신 왕래는 아니었다.
한반도에서 중국에 정기적으로 사행을 파견한 것은 1022년(현종 13)부터로, 고려-거란 관계가 최초였다. 양국이 국경을 맞대게 되면서 안정적,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필요가 낳은 결과물이었다. 이 관행은 이후 고려-원, 조선-명, 조선-청 관계까지 거의 900년 가까이 이어졌다. 명나라는 경전과 기존의 관행에 의거하여, 동아시아 여러 주변국들에 대한 공기(貢期)를 규정하였다.
정기 사행의 종류와 횟수를 보면, 고려는 거란과 금나라에 설날 하례로 정조사(正朝使)를, 황제 생일을 축하하기 위하여 성절사(聖節使)를 파견하였고, 시기에 따라 사하생신사(謝賀生辰使), 진봉사(進奉使)가 정기 사행으로 추가되었다. 매년 정기적으로 사행을 3~4번 파견하였다. 원나라에는 정조사와 성절사를 파견하였다. 조선은 명나라에 정조사, 성절사,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천추사(千秋使)를 정기적으로 파견하였고, 1531년(중종 26)에는 정조사가 동지사(冬至使)로 바뀌었다. 청나라는 이 정기 사행을 모두 합쳐 하나의 사절, 삼절연공행(三節年貢行)으로 파견하게 하여 1645년(인조 23)부터 1893년(고종 30) 청일전쟁으로 조선이 청과의 조공 관계를 중단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정기 사행 외에도 비정기 사행으로 외교 현안이 발생할 때마다 사행을 추가로 파견하였다.
한편 조공품의 종류와 수량은 당나라 시기의 한중 관계에 따라 달라졌다.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청나라는 조선에 징벌적 의미로 일정 기간 동안 막대한 세폐(歲幣)를 바치게 하였지만, 그 외 대부분의 한중 관계 기간 동안 조공품은 의례적인 선물 수준이었다.
한중 관계에서 조공 절차는 대개 사신 일행이 황제가 있는 중국 수도에 가서 외교 문서와 조공품을 바친 뒤, 황제가 주관하는 주요 행사에 참여하고, 중국이 답장과 답례품을 주면 이를 받아 귀국하는 것이었다. 고려-원나라 관계에서 국왕이 직접 원나라에 찾아가는 친조(親朝)의 사례도 있었으나, 그 외에는 사신을 통해 조공이 이루어졌고, 사행 일정 가운데 무역, 관광, 지식인 교류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국내외 다수의 학자들은 조공제도가 동아시아의 보편적 외교 질서라고 단정할 수 없다 해도, 조선-명 · 청 관계는 조공제도의 ‘이상적인 모델’이었다고 말한다. 조공체제의 ‘원칙’이 가장 잘 지켜졌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조선의 특수성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조선-중국 관계의 특징은 13세기 몽골의 동아시아 지역 정복이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몽골제국의 확장은 역사상 이례적인 것으로, 몽골은 의례적인 성격이 강하였던 조공을 지배 관계로 운영하였다. 고려-원 관계를 통해 중국과의 관계가 국가 존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강렬하게 경험한 고려인들은 고려 말 중국 대륙에 새롭게 떠오른 강국 명나라와의 관계도 중시하였다.
고려 말에 정몽주는 모두가 가기 꺼려하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정도전은 정몽주가 명나라에 다녀온 덕분에 고려 백성을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고려 말~조선 초 관료들은 조공을 통해 국가안보를 지키고자 하였다. 그렇기에 중국으로 가는 조선 사행의 핵심 임무도 외교 문서 전달, 명나라의 정국 동향 파악 및 군사 동향 정보 수집이었다.
원나라 이후 한중 관계가 변화한 또 하나의 주요 원인은 원나라 이후 중국의 수도가 조선과 매우 가까운 북경(北京)에 자리 잡았다는 사실이다. 북경의 위치는 조선에게 부담스러운 일이었지만, 중국 입장에서도 조선이 지정학적으로 중요해진 계기가 되었다. 명나라는 몽골과 여진을 견제하기 위해 조선과의 관계 조율이 필요하였다. 원제국 이후 이러한 2가지 변화는 한중 관계에서 양국 모두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명나라가 초기에 조공 방식을 정립해 나갈 때, 고려와 몽골제국의 관계에서 시행되었던 전례들이 대거 참조되었는 점이다. 고려가 명나라에 조공 원칙에 대해 먼저 질문을 던지고 모범 답안까지 알려주었던 덕분이었다. 명 질서가 구현되기까지 다양한 제도와 관행은 명나라 혼자 구상한 것이 아니라 고려와의 관계 속에서 구성되고 구체화되었다는 점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조선은 이렇게 구성된 조공 의례를 준수하였다.
당시 여러 외국 사신들은 명나라에 조공하러 와서 상인(商人)처럼 물건 값 흥정에 열을 올려, 명나라 관료들의 공분을 샀다. 반면 조선은 수면 아래에서는 명나라 정국 동향에 대한 정보 수집에 철저하면서도, 조공 의례를 준수하며 품위와 예의를 갖추었다. 명나라는 그런 조선을 ‘예의의 나라〔예의지국(禮義之國)〕’라 부르며 외교적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우대하였다. ‘예의지국’이라는 국가 위상으로 외교적 우대를 받자, 조선은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에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조선은 명대 조공 질서를 외교 전략으로 충분히 활용하였던 나라였다.
한편 청나라 시기의 조공 관계를 ‘모범적’이라고 보는 데에는 회의적인 시선이 강하다. 조선은 반청(反淸) 인식이 강하였고, 조공국이 수행하는 연호(年號) · 시호(諡號) · 역법(曆法) · 인장(印章) 등의 사용에서 결코 공순한 조공국의 태도를 견지하지 않았다. 물론 강국 청나라와의 안정된 관계를 위하여 사행 파견 등의 각종 절차에서 조공국의 의식을 따랐지만, 청나라에 대한 조공은 피상적인 것이었다는 연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조공을 동아시아 전체의 보편적 외교 질서로 보기는 어렵지만, 한반도 나라들과 중국과의 외교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이 될 수 있다. 당시의 양국 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중국과 만나는 조공의 의전을 인지하며, 국제질서의 전체 흐름과 각국의 내부 상황을 유기적으로 연관시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