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왕은 남북국시대 발해의 제3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737~793년이며 무왕의 아들로 이름은 대흠무이다. 발해국이 성장함에 따라 중경현덕부·상경용천부·동경용원부 등 주로 만주 동부에 위치한 요충지로 천도를 거듭했다. 왕권 강화를 위해 당으로부터 율령을 받아들여 중앙과 지방의 통치제도를 정비했다. 관직에 대응되는 관품제도를 정리하여 관료제를 확립하기도 했다. 문왕이 사용한 대흥보력금륜성법대왕이라는 존호에는 불교의 전륜성왕 이념을 이용해 왕권 강화를 도모한 흔적이 들어 있다. 일본과 수차례 사신을 교환하며 외교관계를 유지했다.
이름은 대흠무(大欽茂)이며 무왕(武王)의 아들이다. 1980년에 발견된 정효공주(貞孝公主) 묘비에 따르면, ‘대흥보력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金輪聖法大王)’이라는 존호를 사용했다고 한다. 737년에 즉위해 연호를 대흥(大興)이라 하고 774년(대흥 38)에 보력(寶曆)으로 고쳤다가 다시 대흥이라는 연호를 사용해 병사할 때까지 그 연호를 지켰다. 1948년 돈화현(敦化縣) 육정산(六頂山)에서 출토된 정혜공주 묘의 비문을 보면 ‘보력’이라는 연호가 7년 이상 쓰였던 것이 분명하다.
문왕(文王)은 고왕(高王) 대조영(大祚榮) 이후 30년간 수도였던 지금의 돈화분지(敦化盆地) 안에 있던 오동성(敷東城)의 비좁은 지역에서 벗어나, 두만강 하류로 흘러드는 해란하(海蘭河) 유역에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 목단강(牧丹江) 유역에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그리고 지금의 훈춘현(琿春縣) 반랍성(半拉城)에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를 구축해 천도를 거듭하였다.
『신당서(新唐書)』 발해전(渤海傳)에 ‘구국(舊國)’으로 적혀 있는 오동성은 주위 길이가 1,000m도 안 되는 넓이였으므로, 이미 그 부근 뿐 아니라 무왕 때 연해주 남부까지 합쳐 해상으로 일본과 통교하던 발해국의 수도로서는 적당하지 않았던 것이 당연하다.
이에 비하면 747∼751년경에 천도해 755년까지 수도로 삼았던 중경현덕부는 철 · 베 · 쌀의 생산으로 발해국의 산업 중심지를 이루었다. 755년부터 약 30년간 수도였던 상경용천부는 뒷날 다시 수도가 되어 발해국이 멸망할 때까지 약 130년간 수도가 되었다.
그리고 785년경에 천도한 동경용원부는 『신당서』 발해전에 ‘ 일본으로 통하는 길(日本道)’이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해상 교통에서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문왕 때의 이러한 천도는, 발해국이 성장함에 따라 그에 상응해 보다 넓은 지역에 자리잡은 수도가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아울러 중경현덕부 · 상경용천부 · 동경용원부의 위치가 모두 만주 동부 지역이었던 것은 곧 발해국의 발전 방향을 나타내는 것이다.
문왕 대흥 25년(762)에 당나라가 종래 ‘발해군(渤海郡)’이라고 호칭하던 것을 ‘발해국(渤海國)’으로 바꾸고 문왕을 발해국왕으로 책봉했다. 이것은 당시 발해국의 성세를 인정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당시 당에 ‘안사(安史)의 난(亂)’ 이후 발해의 도움을 받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문왕은 대당관계(對唐關係)에 있어 57년 동안 61회 이상의 사신을 파견했는데, 이러한 활발한 대당관계를 통해 당의 문물제도를 적극 수용하였다.
왕권강화를 위해 당으로부터 율령(律令)을 받아들여 중앙과 지방의 통치제도를 정비했다. 또한 불교식으로 지은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이라는 문왕의 존호 중 ‘금륜(金輪)’과 ‘성법(聖法)’은 불교의 전륜성왕(轉輪聖王) 이념에서 유래된 것이다. 문왕은 전륜성왕 이념을 이용해 왕권강화를 도모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주변 말갈 제부(諸部)로의 영역 확장과 지방세력의 정비 및 관직에 대응되는 관품제도를 정리하여 관료제를 확립하기도 하였다.
또한 문왕의 재위 기간 중 일본과 수차례에 걸쳐 사신이 내왕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