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길림성(吉林省) 연변(延邊) 조선족자치주(朝鮮族自治州) 화룡현(和龍縣) 용수공사(龍水公社) 용해대대(龍海大隊) 용두산에 있는 정효공주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이 무덤은 용두산고분군에 있는 10여 기의 무덤들 중 하나로서 1980년 10월∼12월, 1981년 5월∼6월의 2차에 걸쳐 연변박물관과 연변조선족자치주 문물관리위원회에서 발굴을 실시한 바 있다.
이 무덤은 대략 남북방향이고, 남북 길이 약 15m, 동서 너비 약 7m이다. 벽돌과 판석(板石)으로 쌓았고, 묘도(墓道) · 묘문(墓門) · 널길〔羨道〕 · 널방〔墓室〕 · 탑의 5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찍이 도굴되었지만 파괴상태는 경미해 전체 구조는 파악할 수 있다.
이곳에 매장된 인골은 도굴 당시 교란되어버려 수습된 인골은 모두 31명에 달한다. 감정 결과 여자 5명, 남자 26명으로 판명되었다. 신장은 여자 약 156㎝, 남자 약 161㎝이며, 남녀 나이 모두 25∼45세 사이에 해당한다.
한편, 이곳에서는 묘비를 비롯해 벽화, 도용(陶俑) 조각, 도금된 동장식(銅裝飾) 및 벽돌 등이 발견되었다. 묘비는 화강암으로 된 규형(圭形)으로, 높이 105㎝, 너비 58㎝, 두께 26㎝ 정도이며, 제(題) · 서(序) · 명(銘)으로 구성된 18행 728자가 기록되어 있다. 글자는 해서(楷書) 정자로 음각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을 정리하면, ‘정효공주는 대흥보력효감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聖法大王)의 제4녀이다. 출가한 뒤 남편이 죽고, 수절하던 정효공주도 대흥 56년(792) 6월 19일 임진에 죽었다. 이 때 나이 36세로 슬하에는 딸을 하나 두었다. 시호를 정효공주라고 하였다. 그 해 11월 28일 기묘에 염곡(染谷)의 서원(西原)에 배장(陪葬)하였다.’로 요약된다.
이 묘비가 발견됨에 따라 용두산고분군이 발해 왕실 혹은 귀족의 묘지임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비문내용으로 정효공주의 신상뿐만 아니라 문왕의 존호 전체 및 정혜공주에 대해서도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정혜공주묘비가 파손된 상태로 발견되어 완전히 판독할 수 없었으나, 유사한 내용을 담은 정효공주 비문을 통해 이를 보완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