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왕 때의 태수였다. 814년(주작 3)에 사신으로서 부사 고경수(高景秀)와 함께 일본에 파견되어 정왕의 죽음을 알렸다. 9월에는 이즈모(出雲)에 도착하였고, 12월에는 당시 일본의 수도인 경도(京都)에 들어가 국서를 전하였으며, 다음해 1월에는 일본왕이 베푼 연회에 참석하였다.
이 때에 일본왕으로부터 종3위(從三位)의 벼슬을 받았으며, 시를 잘하여 일본의 여러 대신들과 시를 주고받으면서 즐겼다. 전에 파견되었던 임동인(林東人)의 전례에 없던 국서내용을 해명하는 등 학식과 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6월에 일본왕의 국서를 가지고 귀국 도중 풍랑을 만나 일본의 에치젠(越前)에 표착하였다. 일본왕의 배려로 큰 배를 타고 가게 되었으나 감기가 들어 죽었다. 이에 일본왕으로부터 정3위(正三位)의 벼슬이 내려지고, 같이 지냈던 일본승려 공해(空海)는 조시(弔詩)를 지어 올렸다.
당시 발해로 가지고 가려던 국서와 사가왕(嵯峨王)이 효렴에게 정3위의 벼슬을 내린 칙서, 그리고 효렴이 일본에서 지은 시 다섯 수가 전하여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