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 때의 수령(首令)이었다. 발해와 일본의 첫 교류가 있었던 727년(인안 9) 9월 정사(正使) 영원장군 낭장(寧遠將軍郎將) 고인(高仁)과 의유장군 과의도위(義游將軍果毅都尉) 덕주(德周)와 별장(別將) 사나루(舍那婁) 등 24인과 일본에 갔다.
도중에 풍랑을 만나 일본의 에조(蝦夷)에 도착하였을 때는 고제덕 등 9인만이 화를 면하였다. 배를 돌려 데와(出羽)에 이르러서는 일본의 쇼무왕(聖武王)이 보낸 사신들의 영접을 받았고, 12월 그당시 서울인 나라(奈良)에 들어갔으며, 이듬해 정월 왜왕을 만나고 무왕의 국서와 선물을 전해주었다.
국서에는 발해가 다시 고구려의 옛 땅에 세워졌고 부여의 유속(遺俗)이 있음을 강조하고, 담비〔貂〕와 쥐가죽〔鼠皮〕 300장을 보낸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이에 고제덕 등 9명은 모두 일본으로부터 정육위(正六位)의 벼슬을 받았으며, 또 큰 잔치로 대접받고 빛깔 고운 비단〔綵帛〕10필, 무늬 있는 비단〔綾〕10필, 명주〔絁〕20필, 실〔絲〕100구(絇), 면(綿) 200돈(屯)을 받았다.
이러한 발해의 사신파견에 답하여 일본에서 같은 해 4월 히키다(引田蟲麻呂)가 사신으로 왔다. 이때 일본의 국서를 전달하고 2년 뒤인 730년 발해국왕의 선물을 받아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