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은 대인수(大仁秀). 대조영(大祖榮), 즉 고왕의 아우인 대야발(大野勃)의 4대 손으로 알려져 있다. 건흥(建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했으며 발해국을 중흥시킨 군주이다.
발해국은 제6대 강왕(康王)대숭린(大嵩璘)이 809년에 죽은 뒤 그를 이은 정왕(定王)대원유(大元瑜)부터 희왕(僖王)·간왕(簡王)에 이르는 3대 왕의 재위 기간이 너무 짧아 정치적 불안을 나타내며 국세는 위축된 듯했는데, 818년 선왕 대에 이르러 침체된 국세가 회복되었다.
≪신당서≫에는 “선왕이 해북(海北)의 여러 부족을 쳐서 영토를 크게 넓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쑹화강(松花江) 하류에서 헤이룽강(黑龍江) 유역에 걸쳐 살며 발해국과는 예로부터 대립적인 태도를 보여 왔던 흑수말갈(黑水靺鞨)이 815년에 다시 당나라에 조공하는 등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이다가, 선왕 대 이후 당나라와의 조공 관계가 단절되었던 사실은 그러한 면을 반증하고 있다.
선왕이 넓힌 영토의 구체적인 지역을 밝힐 만한 자료는 없으나, 발해 전국의 행정 구역을 가리켜 5경(京) 15부(府) 62주(州)라 하고, 또 그 번영을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표현할 만큼 대내외적인 치적을 남겼다. 당나라와의 관계에서는 819∼820년의 2년간에 무려 16회나 조공사를 보냈을 뿐 아니라 그 뒤에도 매년 사신을 파견하였다.
일본과도 매우 활발하게 사신을 교환해, 마치 종주국이나 된 듯이 들떠 있던 일본에서도 이들을 맞이하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어 827년에 이르러서는 12년마다 한 번씩 사신을 받기로 제한할 정도였다. 이것은 발해가 일본과의 외교적 교섭을 이용, 관·사무역으로 경제적 이익을 도모함에 따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