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는 장성(長城) 이북 지역의 여진 촌락들을 기미주(羈縻州)로 편제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완안부(完顏部)를 중심으로 여진 부족들이 통합되면서 고려와 완안부 여진 사이의 무력 충돌이 본격화되었다. 1104년(숙종 9)에 완안부 기병이 장성의 관문인 정주(定州) 지역까지 이르자 고려는 군사를 동원하여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고려는 연이은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장성 이북의 기미주 지역을 모두 상실하였다.
고려는 여진 기병에 대비하고자 별무반(別武班)을 설치하고 대대적으로 군사를 모집하였다. 1107년(예종 2) 12월 14일(을미일)에 고려는 윤관(尹瓘)을 중심으로 17만 대군을 동원하여 동북 갈라전(曷懶甸) 지역으로 출진하였고 요충지에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고려는 여진 촌락들을 간접 지배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거점마다 성곽을 축조하여 영토를 확보하고 남쪽 지역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신개척지를 직접 지배하고자 하였다. 통태진은 이러한 과정에서 축성된 성곽 중의 하나이다.
통태진은 『 고려사)』 기록에 1108년(예종 3) 3월 30일(경진일)에 축성되고 5,000호의 남계(南界) 백성들이 사민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고려사절요』 의 2월 11일(임진일) 기록에 이미 통태진이 등장한다. 아마도 3월 30일 무렵에 성곽 축조와 남쪽 백성의 이주가 공식적으로 완료된 것으로 여겨진다. 『 동인지문사륙(東人之文四六)』 세주 기록에 따르면 윤관 9성은 이주된 백성 호수에 따라 대주(大州), 중주(中州), 소진(小鎭)으로 구분되는데, 5,000호가 사민된 통태진은 규모가 작은 소진이었다.
완안부를 중심으로 한 여진인들의 군사적 저항은 끊이지 않았다. 여진인들은 고려의 성곽들을 포위 공격하였고 일부 성곽들을 함락하기도 하였다. 결국 고려는 축성 지역을 유지하지 못하고 철수하게 되었다. 통태진은 1109년(예종 4) 7월 19일(임술일)에 철거되었다.
고려가 9성을 축성한 지역에 대해서는 함흥평야설, 길주설, 두만강 이북설 등 여러 학설이 분분하다. 지금까지도 여러 학설이 논란이 되고 있는 이유는 관련 사료가 명확하지 않고 남북 분단으로 현지 성곽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이 어렵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의 기록을 주목해 보면 길주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허재묘지명(許載墓誌銘)」에서 9성 가운데 길주가 오랑캐의 변경과 가장 가까운 지역이었다고 기록한 점, 「영주청벽기(英州廳壁記)」에서 고려가 새로 개척한 지역이 장주(長州), 정주로부터 사방 300리 지역이었다고 기록한 점, 『동인지문사륙』 세주 기록에서 9성 지역이 7일정(七日程) 거리였다고 기록한 점 등을 고려해 보면 길주설이 유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