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융진 ()

고려시대사
지명
12세기 초, 윤관(尹瓘)이 동북 변경 갈라전(曷懶甸) 지역에 축성한 진(鎭).
이칭
이칭
평융성(平戎城)
지명/고지명
제정 시기
1108년(예종 3) 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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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평융진은 12세기 초에 윤관(尹瓘)이 동북 변경 갈라전(曷懶甸) 지역에 축성한 진(鎭)이다. 1108년(예종 3) 3월 30일(경진일)에 축성되었고 5,000호의 남쪽 지역의 백성들이 사민되었다. 평융진 철거 시기는 미상이다.

정의
12세기 초, 윤관(尹瓘)이 동북 변경 갈라전(曷懶甸) 지역에 축성한 진(鎭).
위치

평융진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고려가 9성(九城)을 축성한 지역에 대해서는 함흥평야설, 길주설, 두만강 이북설 등 여러 학설이 분분하다. 지금까지도 여러 학설이 논란이 되고 있는 이유는 관련 사료가 명확하지 않고 남북 분단으로 현지 성곽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이 어렵기 때문이다.

형성 및 변천

고려는 장성(長城) 이북 지역의 여진 촌락들을 기미주(羈縻州)로 편제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완안부(完顏部)를 중심으로 여진 부족들이 통합되면서 고려와 완안부 사이에 무력 충돌이 본격화되었다.

1104년(숙종 9)에 완안부 기병이 장성의 관문인 정주(定州) 지역까지 이르자 고려는 군사를 동원하여 전투를 벌였다. 하지만 고려는 연이은 전투에서 패배하였고 장성 이북의 기미주 지역을 모두 상실하였다.

고려는 여진 기병에 대비하고자 별무반(別武班)을 설치하고 대대적으로 군사를 모집하였다. 1107년(예종 2) 12월 14일(을미일)에 윤관(尹瓘)을 중심으로 17만 대군을 동원하여 동북 갈라전(曷懶甸) 지역으로 출진하였고 요충지에 성을 쌓기 시작하였다.

9성은 단계별로 축성되었는데 1107년 12월에 1차로 영주(英州), 웅주(雄州), 복주(福州), 길주(吉州) 등 4성이 축성되었고 1108년(예종 3) 2월에 2차로 함주(咸州), 공험진(公嶮鎭) 등 2성이 축성되었다. 그리고 3차로 3월에 의주(宜州), 통태진(通泰鎭), 평융진(平戎鎭) 등 3성이 추가로 축성되어 9성이 구축되었다.

고려는 여진 촌락들을 간접 지배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거점마다 성곽을 축조하여 영토를 확보하고 남쪽 지역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신개척지를 직접 지배하고자 하였다. 평융진은 이러한 과정에서 축성된 성곽 중의 하나이다.

평융진은 1108년 3월 30일(경진일)에 축성되었고 5,000호의 남계(南界) 백성들이 사민되었다. 『 동인지문사륙(東人之文四六)』 세주 기록에 따르면 9성은 이주된 백성 호수에 따라 대주(大州), 중주(中州), 소진(小鎭)으로 구분되는데, 5,000호가 사민된 평융진은 규모가 작은 소진이었다.

의의 및 평가

고려시대의 기록을 주목해 보면 9성의 범위로 길주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허재묘지명(許載墓誌銘)」에서 9성 가운데 길주가 오랑캐의 변경과 가장 가까운 지역이었다고 기록한 점, 「영주청벽기(英州廳壁記)」에서 고려가 새로 개척한 지역이 장주(長州), 정주로부터 사방 300리 지역이었다고 기록한 점, 『동인지문사륙』 세주 기록에서 9성 지역이 7일정(七日程) 거리였다고 기록한 점 등을 고려해 보면 길주설이 유력하다.

그런데 평융진은 길주 이북 지역에 자리했을 가능성이 있다. 1108년 3월 30일(경진일)에 의주, 통태진, 평융진 3성을 축성하였을 때 박경작(朴景綽)이 윤관에게 “다시 오랑캐의 경계에 깊이 들어가 성을 줄지어 지었다.”라고 비판한 점이 주목된다. 길주 이북의 경계로 깊이 들어가 축성한 성곽은 평융진일 것으로 추정된다.

완안부를 중심으로 한 여진인들은 끊임없이 군사적으로 저항하였다. 여진인들은 고려의 성곽들을 포위 공격하였고 일부 성곽들을 함락하기도 하였다. 결국 고려는 축성 지역을 유지하지 못하고 철수하게 되었다.

1109년(예종 4) 7월 18일(신유일)에 길주에서부터 차례로 성곽들이 철거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이때 철거된 성곽에서 평융진 관련 기록을 확인할 수 없다. 아마도 길주 이북 지역에 위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평융진은 성곽 환부 이전 시기에 여진군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었을 수 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동인지문사륙(東人之文四六)』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허재묘지명(許載墓誌銘)」

논문

홍성민, 「사료의 재검토를 통해 본 고려 윤관의 여진정벌」(『역사학보』 250, 역사학회, 2021)
윤경진, 「고려의 동북 9성 개척에 대한 몇 가지 고찰」(『군사』 114,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20)
윤경진, 「고려 동북 9성의 범위와 ‘공험진 입비’ 문제」(『역사와 실학』 61, 역사실학회, 2016)
송용덕, 「고려의 일자명 기미주 편제와 윤관 축성」(『한국중세사연구』 32, 한국중세사학회,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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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진, 「공험진과 선춘령비」(『백산학보』21, 백산학회, 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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稻葉岩吉, 「高麗尹瓘九城考-特に英雄二州の遺址に就て-(下)」(『史林』16-2, 史學硏究會,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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津田左右吉, 「尹瓘征略地域考」(『朝鮮歷史地理』2, 南滿洲鐵道株式會社, 1913)
松井等, 「滿洲に於けゐ遼の疆域」(『滿洲歷史地理』2, 南滿洲鐵道株式會社, 1913)
집필자
송용덕(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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