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전병은 평상시에는 둔전 경작 및 군수와 군량을 공급하고 유사시에는 전투에 동원되는 병사이다. 병농일치의 이념에 입각하여 둔전을 기반으로 군사적 업무에 종사하는 병종을 통칭한다. 고려시대 양계에 주진둔전군의 형태로 존재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각급 군사기관에 예속되어 군역을 매개로 둔전 경작에 동원되었고, 응모군, 포수, 살수, 초병, 승병 등과 같이 다양하게 나타났다. 가장 대표적인 병종은 둔전 경작자 가운데 선발하여 군사력에 충당된 아병(牙兵) 또는 둔아병(屯牙兵)이다. 국역체제가 해체되고 재정운영 방식이 변화하면서 형식만 남게 되었다.
둔전은 원래 교통과 운송이 미발달한 중세사회에서 국방상의 요충지에 주둔하고 있는 군사로 하여금 황무지, 진전(陳田) 등을 개간 · 경작케 하여 군수에 충당하는 군사목적용 특수지목이었다.
둔전병은 이러한 둔전을 기반으로 병농일치(兵農一致)의 이념에 입각하여 군사적 업무에 종사하는 병종을 통칭한다. 따라서 둔전병은 둔전을 경작하여 군량을 공급하고 유사시에는 부대에 편제되어 전투에 동원되는 이른바 차전차경(且戰且耕)의 병사이다.
고려시대부터 본격적으로 확인되는 둔전병은 조선 왕조에 접어들어 중앙과 지방의 각급 군사기관에서 다양한 형태의 둔전을 설치함에 따라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둔전병적 형태가 보이는 때는 고려시대부터이다. 둔전이 집중적으로 설치되었던 양계 지역의 둔전병은 주진둔전군(州鎭屯田軍)의 형태로 존재했다. 이들은 주로 백정대(白丁隊)나 주진의 토착적인 병종으로 구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로 넘어오면 지방의 영(營) · 진(鎭) · 포(浦) 등의 둔전에서 둔전병에 의한 경작이 확인된다. 영 · 진 · 포의 병마 · 수군첨절제사와 만호 등의 감독 하에 둔전병이 운용되었는데 수군(水軍) 병종이 주를 이루었다. 국둔전(國屯田)의 둔전병으로는 수군 외에 차정군(次正軍) · 수성군(守城軍) · 잡색군(雜色軍) 등이 있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각급 군사기관들이 광범위하게 둔전을 설치함에 따라 둔전병의 성격을 가지는 병종은 더욱 늘어나게 되었다. 17세기에 긴장된 국제정세를 배경으로 추진된 국방 강화책은 이러한 추세를 더욱 가속시켰다. 둔전병은 각급 군사기관에 예속되어 군역을 매개로 둔전 경작에 동원되었다.
초기에 이들의 병종은 응모군(應募軍), 포수(砲手), 살수(殺手), 초병(哨兵), 승병(僧兵) 등 다양하게 나타났다. 이들 외에 노잔군(老殘軍), 궐액군(闕額軍), 잡탈(雜頉) 등과 같이 정규 병력이라고 하기 어려운 부류도 둔전을 경작하였는데 이들의 둔전 경작도 국역 체계와 괴리될 수 없었다.
둔전병에 해당하는 병종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유민작대책(流民作隊策)에 입각한 둔전 경영이었다. 이는 생계가 어려운 유민을 모집하여 둔전을 경작케 하고 이들의 생계를 보장해준 후 군졸로 편입시키는 방안이었다. 유민을 모집하여 설치한 둔전은 개간을 통해 농지를 확보함은 물론 국가의 파악 대상에서 이탈하여 유리 유망하는 이들 유민을 모집, 자립도를 제고시켜 궁극적으로는 국역 편제로 흡수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둔전병의 형태는 ‘ 아병(牙兵)’ 또는 ‘ 둔아병(屯牙兵)’이다. 둔아병은 둔전 경작자 가운데 신체 조건이 좋은 사람을 선발하여 군사력에 충당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이들 둔아병을 부대로 편성하여 초관(哨官)의 주관 하에 군사 훈련을 병행하였다. 이들 아병의 역가(役價) 부담은 둔전 경작과 긴밀하게 관련되었다.
예컨대 수어청 둔아병은 둔전을 경작하는 경우에 비해 둔전을 경작하지 않는 경우의 역가가 월등히 높게 나타났다. 1703년(숙종 30) 이정청의 역가조정이 이루어지기 전 ‘구군제(舊軍制)’로 나타난 둔아병의 역가는 양인 1냥=미 3두, 노병(奴兵)은 5전=미 1.5두를 부담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둔전을 경작하지 않는 경우에는 양인 미 12두, 노병 미 4두를 부담해야 했다.
이 같은 차이가 발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둔전 경작 아병을 중심으로 성조(城操) 등 역역동원(力役動員)이 이루어지고 여기에 둔토로부터의 지대 납부 등의 부담 일체가 감안되어 그만큼 역가를 경감시켰기 때문이었다. 이들 둔전병적 역종은 농우 · 농기구 · 종자 · 농량 등 둔전 경영에 필요한 일체의 생산 자료를 국가에서 제공받는 것이 원칙이었다.
18세기 초 강화 선두포(船頭浦) 둔전의 경우 무학(武學) · 속오(束伍) · 장려(壯旅) · 의려(義旅) · 아병(牙兵) · 교련관(敎鍊官) · 사청군관(四廳軍官) · 오반영속(五班營屬) · 도제도(都制導) · 교사(敎師) · 별파진(別破陣) 등 다양한 군역 · 직역자가 나타나는데 이들 대부분이 둔전병적 형태였다.
무학과 속오는 매초(每哨)마다 각기 5석락지(石落只)를 분급받고 장려 · 의려는 매초마다 3석락지를 분급받고 있으며 이들의 관리는 초관이 담당하였다. 둔전병의 둔전 경작은 ‘영(營)-사(司)-초(哨)-기(旗)-대(隊)’의 부대 편제 중 ‘초’ 단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둔전의 분급은 둔전민의 신역의 경중을 가장 중요한 근거로 삼았다.
하지만 조선 후기 접어들어 진행된 부역 체제의 해체는 둔전병의 존립기반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었고 이들 병종은 결국 물납화되거나 유명무실한 상태로 변질되었다. 둔전병에 의한 둔전 경영은 점차 민전과 마찬가지로 병작제를 도입하는 것이 대세였다. 여기에는 중세적 신역제를 거부하고 저항하는 둔전병들의 광범위한 저항이 놓여있었다.
둔전병은 새로운 군사 재원의 창출이 어려운 상황에서 토지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사회적 생산관계를 기반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가장 대표적인 병력 운용 방식이었다. 병농 일치의 이념을 이상으로 한 둔전병의 운용은 시기별 농업경영방식에 크게 규정되었으며 군사제도의 변화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하지만 조선왕조의 둔전병은 국역체제의 해체와 재정운영 방식의 전반적인 변화에 따라 점진적으로 형해화(形骸化)되는 길을 걷게 되었다. 이는 기본적으로 중세적인 신역제를 더 이상 용인하지 않으려는 둔전병들의 끈질긴 저항에 말미암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