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민변정도감은 고려 후기에 권세가의 대토지 불법 소유 및 농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설치한 관청이다. 고려 후기에 토지 침탈과 백성의 궁핍 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1269년(원종 10)에 처음 설치된 기구였다. 이후 1288년(충렬왕 14), 1301년(충렬왕 27), 1352년(공민왕 1), 1366년(공민왕 15), 1381년(우왕 7), 1388년(우왕 14)에도 역시 토지와 백성에 대한 문제 해결을 위해 반복해서 설치되었으나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폐지되었다.
무신정권 시기를 거치면서 대토지의 소유 형태인 농장(農莊)이 합법, 불법적 수단으로 발달하는 가운데 여기에 농민들이 모이면서, 농장주는 권력을 이용하여 조세 부담을 피하고, 농민들 역시 농장주에 의지하여 세금 부담을 회피하였다. 이에 따라 국가 재정이 심각하게 파탄날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이 같은 상황의 해결을 위하여 종종 임시 기구가 설치되었는데, 전민변정도감의 설치도 그 일환이었다.
1269년(원종 10)에 최초로 설치할 당시 집정이었던 김준의 재산을 정리하고, 1288년(충렬왕 14)에는 충렬왕의 측근인 최세연 세력이 지닌 전민(田民)을, 1381년(우왕 7)에는 이인임(李仁任)과 그 무리, 1388년(우왕 14)의 경우에는 임견미(林堅味) 등이 소유한 전민의 추쇄를 목적으로 하던 것으로 보아, 숙청되거나 실각한 권세가들의 자산을 정리하는 데에 1차적인 목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노비제도와 관련하여서도 활동하였는데, 1301년의 경우 정동행성평장사(征東行省平章事) 고르기스〔濶里吉思〕에 의해 고려의 관습과 다르게 풀린 노비를 추쇄하는 등 노비제의 정비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공민왕은 1365년(공민왕 14)에 신돈을 등용하여 사회경제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에 따라 신돈은 가뭄 때문에,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설치한 형인추정도감(刑人推整都監)을 확대하여 1366년 5월에 전민추정도감(田民推整都監)으로 개편하고, 스스로 판사(判事)가 되어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토지와 노비에 대한 개혁을 통해 국정을 장악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신돈의 실각과 공민왕의 친정이 이어지면서 전민변정도감의 활동은 판도사, 도관 등으로 이관되어 해체되었다.
1269년(원종 10)에 무신집정 김준의 피살을 계기로, 토지를 비롯한 그의 재산을 처리하기 위하여 설치하였고, 여기에는 사(使), 부사(副使)를 두었다.
이어 1288년(충렬왕 14)에 다시 전민변정도감이 등장하였다. 이때에는 두 차례에 걸친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이 실패로 돌아가고 국왕의 측근인 환관 최세연이 뇌물 수수 및 노비의 불법 취득 등이 문제가 되어 유배가는 등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곧 일본 원정을 준비하면서 피폐해진 고려의 사회경제와 측근의 득세로 인한 정치적인 부패가 전민변정도감을 두어 개혁하려 한 배경으로 짐작된다.
다음 1301년(충렬왕 27) 8월에는 전민변정사(田民辨正司)가 등장하는데, 이것도 전민변정도감과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이때에는 1298년에 있었던 충선왕으로의 왕위교체와 충렬왕의 복위(復位)가 이어지는 정치 혼란 속에서 벌어진 권력 갈등으로 인해 충선왕 측을 견제하려는 의도로 진행된 것으로 이해된다.
한동안 보이지 않던 전민변정도감은 공민왕 대인 1352년과 1366년에 다시 등장하였다. 1352년에 공민왕은 이제현을 등용하고서 8월에 권세가에게 빼앗긴 전택(田宅)과 노비 문제로 걸린 소송과 억울한 옥사를 살펴보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인승단(印承旦)이 변정도감(辨整都監)의 폐지를 주장한 일도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이 바로 이러한 문제를 주관한 기구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366년에는 신돈을 등용하여 개혁을 추진하는 가운데 전민추정도감(田民推整都監)을 설치하고 있다.
우왕 대인 1381년에는 전민변위도감(田民辨僞都監)이, 1388년에는 전민변정도감을 두어 권력자들의 불법적인 행위에 대한 뒤처리를 위하여 설치된 바 있다.
전민변정도감은 고려 후기의 토지 침탈로 심화되는 재정 위기와 노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표적인 개혁 움직임이었다. 이 때문인지 고려 후기의 사회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조선 초기의 유학자에게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할 만큼 주목할 만한 활동이었다. 신돈의 경우에서 보듯이 당시 일반 민중에게 크게 지지를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사안별로 단기간의 활동에 그쳤고, 근본적인 개혁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등 한계가 뚜렷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