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이 고려에 대해 폐정 개혁을 요구한 것을 기회로 설치한 폐정 개혁 기관이다.
몽골(원)의 정치적 간섭과 영향으로 정치적 · 사회적 혼란이 극도에 달한 상태에서 충목왕(忠穆王)이 8세로 즉위하자, 나라를 바르게 하자는 ‘복정삼한(復正三韓)’의 주장 아래 개혁의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다. 이러한 고려의 폐정 개혁 움직임에 몽골(원)의 조정도 큰 관심을 표시하였다.
1343년( 충혜왕 복위4) 11월에 몽골이 충혜왕(忠惠王)을 압송해 가면서 고려에 ‘정치(整治)’라는 정치 개혁을 요구하였고, 이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중심으로 개혁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다가 1344년(충혜왕 복위5)에 충목왕이 즉위하면서 이제현(李齊賢)이 시폐(時弊)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왕후(王煦)가 우정승(右政丞)에 취임해 개혁적 시책을 베풀었다. 이에 정방(政房)이 혁파되고, 녹과전(祿科田)이 복구, 정비되었다. 그러나 반대 세력 때문에 개혁 시책은 성공되지 못하고, 왕후도 1345년(충목왕 1)에 파직되면서 이때의 개혁 시도는 실패하게 된다. 1346년(충목왕 2) 12월 왕후는 몽골(원)로 가서 순제(順帝)로부터 고려의 폐정 개혁에 대한 명령을 받고 돌아와, 1347년(충목왕 3) 2월 정치도감(整治都監)을 설치하고 본격적인 개혁 활동을 벌였다.
먼저 정치관(整治官)들을 안렴존무사(按廉存撫使)를 겸하게 하여 각 도에 보내 토지의 탈점(奪占)과 겸병(兼倂)을 조사하고, 폐단들을 적발, 응징하도록 했는데, 정리도감장(整理都監狀)이 그 지침이 되었다. 그리고 원(元)나라와 친밀했던 우정승 채하중(蔡河中), 좌정승(左政丞) 노책(盧頙), 정동행성이문(征東行省理問) 윤계종(尹繼宗), 단양부원대군(丹陽府院大君) 왕후, 기황후(奇皇后)의 동생 기주(奇柱) 등 유력자들을 구속하였다. 이때 기황후의 친족 기삼만(奇三萬)이 옥사하자, 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는 정치관들을 구속하였다. 그러자 원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어 정치관들을 국문하고 장형(杖刑)에 처하였다. 이러한 시련 속에서 정치도감의 본격적 활동은 3개월 만에 와해되었으며, 1349년(충정왕 1) 정치도감이 폐지되면서 이를 통한 개혁 움직임도 끝이 났다.
개혁 활동은 체계적인 정리도감장에 의해 당시 사회의 모순과 폐단을 시정하려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이제현, 왕후 등이 개혁 방향을 주도하였으며, 구체적으로는 정치 · 경제 · 사회면에서 12개 조항의 당면 문제가 거론되고 있다. 정치면에서는 지방관의 탐학과 정동행성 관리의 작폐가 지적되었다. 사회면에서는 일반 백성들이 피역(避役)을 목적으로 정동행성 · 홀치(忽赤) · 순군(巡軍) 등에 투속하는 현상을 문제 삼았다. 가장 큰 관심이 표명된 경제면에서는 환관(宦官) 족속(族屬)과 권세가(權勢家)가 불법으로 토지를 점령해 농장(農莊)을 설치하고, 그것을 근거로 고리대(高利貸)를 자행하며, 양민을 협박해 노비로 삼는 일에 대해 응징, 시정할 것을 명시하였다.
몽골(원)의 정치 개혁 요구를 명분 삼아 추진하던 개혁이었기에 정치도감의 활동은 전국의 토지와 노비 문제에 걸쳤고, 지위 고하에 관계없이 불법 행위자를 처벌하였다. 이때 처벌 대상에 기씨 일족과 같은 친원 세력도 포함되었고, 이것이 빌미가 되어 몽골(원) 측과의 갈등이 빚어지게 되었다. 조직은 계림군공(鷄林郡公) 왕후, 좌정승 김영돈(金永旽), 찬성사(贊成事) 안축(安軸), 판밀직(判密直) 김광철(金光轍) 등 재추(宰樞)급의 4인을 판사(判事)로 하고, 그 밑에 사(使) 9인, 부사(副使) 7인, 판관(判官) 12인, 녹사(錄事) 6인 등 모두 34인을 속관(屬官)으로 하였다. 속관은 정연(鄭珚) · 이원구(李元具) · 곽운(郭㻒) · 백문보(白文寶) · 전녹생(田祿生) · 신군평(申君平) 등을 비롯해 30인이었다. 이들은 정치관으로 총칭되기도 했는데, 정치도감의 개혁 활동을 직접 맡았던 장본인들이다. 대부분 과거로 입사(入仕)한 이들이었다.
정치도감의 개혁 과정에서 개혁 대상으로 당시 고려 사회의 부조리를 야기시키는 주체라 할 수 있는 원나라와 관계가 깊은 기관이나 친원 관계를 통해 대두한 정치 세력이 지적되고 있다. 무엇보다 몽골(원)의 요구로 시작된 정치 개혁의 연장선에 있지만, 몽골의 요구는 구체적이지 않았고 실제 개혁은 이제현과 왕후 등 고려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친원 세력과의 충돌도 마다하지 않으면서 추진되었다. 이 때문에 친원 세력의 충돌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 개혁 운동이 실패하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이때 정치관으로 활동한 이들의 대부분은 유교적 소양을 바탕으로 사회의 모순을 통찰하는 식견과 권력자에게 굴하지 않는 기개를 갖추고 있었다. 특히 대간이나 법관으로 활약한 경우가 많으며, 뒷날 공민왕(恭愍王) 때의 반원개혁정치(反元改革政治)와 연계성을 지니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