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방 ()

고려시대사
제도
1225년(고종 12) 6월, 최우가 자기 집에 설치한 인사담당 기관.
이칭
이칭
정당(政堂), 정사당(政事堂), 죽당(竹堂), 지인방(知印房), 차자방(箚子房), 상서사(尙書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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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정방은 1225년(고종 12) 6월, 최우가 자기 집에 설치한 인사담당 기관이다. 정당·정사당·죽당이라고도 한다. 최충헌 때부터 자신의 집에서 문무백관의 인사행정을 마음대로 해 오던 것을 최우가 공식 인사기구로 정착시킨 것이 정방이다. 무신정권은 행정실무와 문서작성에 능한 관리가 필요했고 여기에 벼슬길 진출을 갈망하던 사인층의 요구가 서로 부응하면서 설치되었다. 정방은 관리의 임명과 해임, 승진과 좌천 등 모든 권한을 장악하여 인사행정을 다루었다. 무신정권 이후에도 국가기관으로 변해 폐지와 재설립을 반복하다가 1388년(우왕 14)에 폐지되었다.

정의
1225년(고종 12) 6월, 최우가 자기 집에 설치한 인사담당 기관.
개설

정방(政房)은 고려 무신정권기에 최우(崔瑀)가 문무백관의 인사행정을 담당하기 위해 자기 집에 설치한 기구로, 정당(政堂), 정사당(政事堂), 죽당(竹堂) 등이라고 한다. 이후 고려 말에 지인방(知印房), 차자방(箚子房)으로도 불려지다가 창왕 때 상서사(尙書司)로 개칭되었다. 최충헌(崔忠獻) 때부터 이미 자기 집에서 문무백관의 인사행정을 마음대로 하였는데, 최우가 이것을 공식 인사기구로 설치한 것이다. 무신정권이 무너진 뒤에는 국가기관으로 변해 존속되었다가 1388년(우왕 14)에 폐지되었다.

내용

정방은 무신정권기에 행정실무에 어두워 문학 · 이무(吏務)에 능한 사람이 필요했던 무신집권층과 벼슬길에 진출을 갈망했던 사인(士人, 벼슬하지 않은 선비)이 서로 부응한 당시의 시대적 요구에 의해 설치되었다.

원래 인사문제는 이부(吏部)와 병부(兵部)의 소관이었다. 문신은 이부에서, 무신은 병부에서 정안(政案)에 따라 처리되었다. 그런데 최충헌이 집권한 뒤 인사권을 자신의 개인 집에서 마음대로 처리하였다. 최우는 부친이 마련한 이러한 조치를 발판으로 삼았음은 물론 더 나아가 백관이 그의 사제에 나아가 정부(政簿)를 바치는 형식을 취하여 공식적인 승인 절차를 밟게 함으로써 반발세력을 무마시켰다. 그리고는 자신의 집에 ‘정방’이라는 이름으로 공식 인사기구를 설치하면서 공식화하였다. 그는 문사(文士)들을 정방의 직원으로 임명해 그들에게 관직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것은 본격적인 사적 인사담당 기구의 탄생을 의미하며 또한 그 조직도 이 때 정비된 것으로 보인다.

정방에서 관리의 임명과 해임, 승진과 좌천 등에 관한 이른바 전주(銓注: 관리를 임명하기 위해 직임에 합당한 인물을 임금에게 추천하는 일)의 권한을 장악하여 모든 인사행정을 행하였다.

관제는 특별히 정해져 있지 않았으며 정방의 최고 책임자로서 왕에게 상주하는 직책을 가진 정색승선(政色丞宣)을 두었다. 정색승선은 1278년(충렬왕 4) 경에 재상이 정방의 전주에 참여하는 제도가 마련되기 이전까지는 정방의 최고 책임자로서 인사를 장악하였다. 이를 보좌하는 3품 정색상서(政色尙書)와 4품 이하인 정색소경(政色少卿)을 두었다. 그 아래에는 서기 직의 정색서제(政色書題)가 있었다. 또한 이때 문사(文士)들을 뽑아 필도치(必闍赤)라는 직책을 주어 사무를 보게 하였다. 지인(知印) 등의 관직도 설치연대는 알 수 없으나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그러나 공설기관으로 된 1258년(고종 45) 이후에도 관제화된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면, 앞의 관직들도 일정한 직제로 확정되었던 것 같지는 않다.

이것을 통해 최씨 정권은 명실공히 문무양반의 지배자가 됨으로써 권력이 확고해졌다. 한편 문신들이 대두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기 때문에 무신정권 몰락 이후에도 국가기관으로 남게 되었다.

변천

1258년(고종 45) 3월에 김준(金俊) · 유경(柳璥) 등이 최의(崔竩)를 죽이고 정방을 궁중으로 옮겼다. 유경은 일찍이 최씨의 3대 집정 최항(崔沆)에게 신임을 받아 정방에 종사한 일이 있었고, 집권자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궁중에 정방 설치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정방이 국가기관으로 되면서 권문세가들이 장악하게 되었고, 이제는 능문능리(能文能吏)의 신흥 관료의 진출을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 막아버리는 관부로 바뀌어 갔다. 이러한 현상은 충렬왕 때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고려 말까지 개혁 정치를 표명할 때마다 정방의 폐치가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것은 개혁 정치의 추진 세력으로서 신진 관인을 등용하려면 권문세가의 관부로 되어버린 정방을 폐지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1298년(충렬왕 24) 충선왕은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을 단행하면서 정방을 폐지하고, 정방이 가지고 있던 전주권을 사림원(詞林院)에 주었다. 그러나 이 개혁은 실패하였다. 충선왕은 다시 1307년(충렬왕 33)에 원나라를 배경으로 하여 충렬왕의 일당인 왕유소(王維紹) 등을 숙청하고, 정방을 혁파하면서 전주권을 전리사(典理司)와 군부사(軍簿司)로 이관시켰다.

1320년(충숙왕 7)에 정방이 다시 설치되었다. 당시 충선왕은 아들 충숙왕에게 선위를 했지만 연경(燕京: 지금의 중국 북경)에서 충숙왕의 일에 간섭했고, 특히 그의 신하였던 권한공(權漢功) · 최성지(崔誠之) · 이광봉(李光逢) 등에게 전주권을 장악하게 하였다. 이 때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의 참소로 충선왕이 실각하게 되자, 충숙왕은 심왕당(瀋王黨: 충선왕당)을 제거하기 위해 다시 설치했다. 그러나 1344년(충목왕 즉위년) 12월에 이제현(李齊賢) 등이 주도해 개혁 정치를 펼 때 다시 혁파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1월 다시 설치되었는데, 왕의 모비(母妃) 덕녕공주(德寧公主)의 압력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정방이 설치된 뒤 신예(辛裔), 전숙몽(田叔蒙), 강윤충(康允忠) 등이 공주에게 의지해 전주권을 마음대로 한 사실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1352년(공민왕 1) 1월에는 공민왕이 고질화된 권신 세력을 배제하고 새로운 정치 개혁을 단행하기 위해 문무전주권(文武銓注權)을 전리사와 군부사에 속하게 하였다. 그러나 조일신(趙日新) 등 권신들의 반발로 1356년(공민왕 5)까지 실시되지 못했으며, 이때의 정방 혁파는 명목상의 조처에 불과하였다. 이 해에 기철(奇轍) 일당이 비로소 제거되면서 정방은 혁파되어 전주권은 이부와 병부로 돌아갔다.

그러나 정방은 신돈(辛旽) 집권시에 부설된 듯하다. 그것은 성석린(成石璘)이 차자방지인(箚子房知印)이 되어 신돈에게 아부하지 않아 임박(林樸)으로 바뀌었다고 한 사실이나, 우왕 때 권신 이인임(李仁任) · 임견미(林堅味) · 염흥방(廉興邦) 등이 정방제조(政房提調)가 되어 전주를 마음대로 했다는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 뒤 1388년(창왕 1)에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 이후 집권체제를 굳힐 때에 정방을 혁파하고 상서사(尙瑞司)를 설치하였다. 그것으로 지금까지 관제(官制) 밖에 있던 정방이 관제 내로 들어오게 되었으며, 이성계를 둘러싼 신흥세력의 진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정방의 폐치는 관인층 내부의 분열대립의 한 현상이었다. 권신들은 정방을 통해 인사권을 장악하고, 전민(田民)를 탈취해 전제(田制)를 문란하게 하였다. 따라서 전제와 전주법이 문란해진 시기가 바로 정방의 부설시기와 일치하고 있다. 이러한 예는 이인임 · 임견미 · 염흥방 등 정방제조가 된 권신들의 행위에서 잘 나타난다.

반면 신흥 관인층은 정방 권신들의 부패된 권력 구조에 반발하고 관인체제의 질서회복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정방을 혁파해 전주권을 전리사와 군부사에 줌으로써 관인지배질서를 회복시키고, 권신들이 탈취한 녹과전(祿科田)을 본래의 전주(田主)에게 돌려줄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표되는 사람으로는 이제현과 왕후(王煦) 등인데 특히 왕후는 정방 혁파와 녹과전에 대한 원주인에의 환급을 주장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났다. 정방 권신들에게는 정방 전주권(政房銓注權)의 장악이 토지를 겸병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며, 신진관인층에게는 자기발전을 위해 이들을 타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의의와 평가

초기의 정방이 신진 관인들의 진출에 교량적인 역할을 하였던 데 비해 후기의 그것은 권문세족들의 세력 구축의 발판으로 이용되었고, 신진 관인층의 성장 발전을 저해, 억압하는 낡은 권력구조의 유제(遺制)로 변화하였다. 이들 사이의 분열과 대립이 정방 폐치의 반복으로 나타났으며, 사전혁파(私田革罷)의 주장으로 나타났다.

신진관인층의 한 사람이던 이성계는 1388년(우왕 14) 위화도 회군 이후 9월에 정식으로 정방을 혁파하고 상서사를 성립시켰다. 이것은 고려 후기 이래로 계속되어오던 권력구조의 낡은 유제의 퇴보를 말하는 것이고, 새로이 등장한 관인층의 행정적 필요성에 의해 상서사가 성립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정방은 무신정권기에 문반이 벼슬길로 나아갈 수 있는 통로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고, 이 때문에 무신정권이 무신만을 대표하는 정권이 아닌 문신도 포괄하는 정권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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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역옹패설(饑翁稗說)』
『목은집(牧隱集)』
『고려시대사』(박용운, 일지사, 2008)
『고려후기 정방 연구』(김창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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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사』(박용운, 일지사, 1988)
「고려후기 정방의 구성과 성격」(김창현, 『한국사연구』87, 1994)
「여말선초의 상서사」(김윤곤, 『역사학보』25, 1964)
「고려 정방고」(김성준, 『사학연구』13,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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