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목도감은 고려시대의 법제회의기관이다. 고려는 당제를 모방해 2성6부의 중앙관제를 정비하면서 별도로 독자적인 두 개의 회의기관을 만들었다. 하나는 대외적인 국방과 군사문제를 관장하는 도병마사이고, 또 하나는 대내적인 법제와 격식을 관장하는 식목도감이었다. 식목도감은 도병마사와 더불어 고려의 독자적인 정치기구였는데 두 기관은 정치의 부침에 따라 경쟁관계 속에서 관장 업무가 변화하면서 국정최고회의기관의 역할을 담당했다. 고려말 식목도감은 무력화하여 부정 관리에 대한 탄핵을 담당하는 식목녹사 기능만 유지하다가 조선초에 의정부에 흡수되었다.
고려는 당제(唐制)를 모방해 2성6부(二省六部)의 중앙관제를 정비했으며, 별도로 독자적인 두 개의 회의기관을 만들었다. 하나는 대외적인 국방과 군사문제를 관장하는 도병마사(都兵馬使)이고, 또 하나는 대내적인 법제와 격식을 관장하는 식목도감(式目都監)이었다. 식목도감은 중앙관제가 성립한 뒤인 성종(成宗) 말과 현종(顯宗) 초에 걸쳐 설치되어 적어도 1023년(현종 14)에는 그 기능을 나타내게 되었다. 구성은 그것이 법제를 제정하는 회의기관이기 때문에 그 관원은 타직으로 임명된 회의원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고려사』 백관지(百官志)에 기록된 문종(文宗) 때 관제의 구성원을 보면, 성재(省宰)로 임명된 사(使) 2명, 정3품 이상의 부사(副使) 4명, 5품 이상의 판관(判官) 6명으로 도합 12명이 있고, 그 밑에 사무직인 녹사(錄事) 8명이 딸려 있다. 실제로 수상(首相)이 대표로서 사가 되고, 3품직을 겸한 추신(樞臣)이 부사가 되어, 재추(宰樞)가 주요 구성원을 이루었으며, 판관도 확대회의에 참가했으니, 이는 도병마사의 인원 구성과 같았다. 중요 안건은 이들 회의원의 합좌회의에서 의결되고, 그 결정사항은 대표인 식목도감사(式目都監使: 수상)에 의해 국왕에게 상주(上奏)되었다. 기능은 ‘식목(式目)’의 명칭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제도와 격식을 의논, 결정해 상주하는 회의기관으로 그것을 집행하지는 않았다. 또한, 제정된 제도 · 격식에 대한 자료를 보관했는데, 그것은 『식목편수록(式目編修錄)』에 수록되었다. 특히 관리등용에 있어서 엄격한 신분성을 강조했는데, 그것이 귀족정치기에 문신귀족의 세력기관으로서 엄격한 신분격식의 유지를 기도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고려의 독자적인 회의기관인 도병마사와 식목도감은 같은 양부재추(兩府宰樞)로 조직된 합좌회의이며, 같은 금내관(禁內官)으로서 병렬적인 위치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도병마사에서도 대내문제를 의논하고, 식목도감에서도 대외문제를 발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직이나 구성상으로 보아 도병마사가 우위에 있었고, 이는 장차 도병마사가 도당(都堂)으로 대두하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도병마사는 고종(高宗) 때부터 도당으로 불리면서, 종래의 대외적인 국방문제를 넘어서 모든 국정의 중심기구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도병마사의 기능 확대는 식목도감으로 하여금 종속적 지위로 격하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충렬왕(忠烈王) 때 도병마사가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로 개편되어 그 기능과 구성이 확대됨에 따라 상대적으로 식목도감의 기능은 침탈되었다. 이에 식목녹사(式目錄事) 중심의 무력 기구로 전락하고, 판안(判案)의 소장이나 맡는 기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1310년(충선왕 2) 이러한 지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는 일대개혁이 단행되었다. 즉, 식목도감으로 하여금 방국(邦國)의 중사를 관장하고, 첨의평리(僉議評理) 이상을 판사, 지밀직(知密直) 이하를 사로 삼게 하였다. 이와 같이 충선왕(忠宣王) 때 방국의 중사를 관장하고, 또 재추 · 삼사(三司)의 재상으로서 회의원을 구성하게 한 것은, 지금까지의 도평의사사의 기능 · 구성과 같게 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러한 조치는 충선왕이 대립적인 충렬왕파의 구세력을 산제(刪除)하기 위해 단행한 것으로, 종래의 도평의사사 대신 식목도감을 도당으로 삼아 새로운 권력기구로 개편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때부터 도평의사사를 대신해 도당이 되고, 국가의 중대사를 관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충혜왕(忠惠王) 때에 다시 도평의사사가 도당의 지위로 환원되면서 종전과 같은 무력기구로 떨어지게 되었다.
고려 후기에도 식목도감이라는 기구가 존재했지만 그 기능은 보잘 것 없었다. 다만 식목녹사가 부정 관리에 대한 탄핵, 특히 대간(臺諫)에 대한 탄핵을 담당한 것이 특징이고, 재추의 합좌기능은 무력하였다. 고려 말의 식목도감은 조선 초까지 계속되다가 태종(太宗) 때 의정부(議政府)에 흡수되었다. 조선 초기에도 식목녹사가 의정부(도평의사사의 후신)의 명에 따라 3성의 법사(法司)를 탄핵하는 기능을 가졌을 뿐이고, 대개 문안(文案)의 관장이나 하는 무력기구라는 점에는 변화가 없었다. 이와 같이 고려말 조선초의 식목도감은 도병마사와 병립한 권력기구가 되지 못하고, 식목녹사만이 도당인 도평의사사(의정부)에 예속되어, 문안을 담당하고 도당의 명에 따라 사법관을 탄핵하는 데 그쳤다. 1412년(태종 12)에 식목녹사가 의정부안독녹사(案牘錄事)로 바뀌어 의정부에 흡수되었다.
식목도감은 도병마사와 함께 당 · 송나라나 신라 · 태봉(泰封)의 관제에 기원하지 않은 고려 독자적인 정치기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