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창(群山倉)은 1512년(중종 7)부터 19세기 말기까지 운영되었던 조창으로서, 전라도 전주와 그 주변 지역의 세곡(稅穀)을 모아 한성의 경창(京倉)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중앙 정부는 전국의 주요 지점에 조창을 설치하고 조운(漕運)을 통하여 각 지방의 세곡을 경창으로 운반하였다. 금강 수계 일대는 고려시대 이래 조창이 설치된 지역이었다. 고려시대에는 현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성산면 지역의 금강 하구에 진성창(鎭成倉)이 있었다. 그러나 왜구의 침략으로 인하여 진성창이 더 이상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되자, 조선 초기에는 좀 더 금강을 거슬러 올라간 지점에 조창을 설치, 운영하였다. 용안 득성창(得成倉, 13901428년, 14871512년)과 함열 덕성창(德成倉 혹은 德城倉, 1428~1487년)이 그에 해당한다.
득성창과 덕성창은 조선 초기에 금강 하구 지역에 교대로 설치되어, 전라도 전주와 그 주변 지역의 세곡을 경창으로 운송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1512년에는 득성창이 폐쇄되고, 옥구 군산포에 군산창(群山倉)이 신설되어 그 역할을 대신하였다. 군산창의 현 위치는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금동에 해당하였다. 조선 전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득성창은 전주와 금산, 남원 등 20개 고을의 세곡을 수납하여 경창으로 운송하는 조창이었다. 군산창은 득성창의 역할을 그대로 대신하였다.
군산창의 조창 업무는 해운판관(海運判官)이 담당하였다. 해운판관은 한성과 지방의 선박을 관장하는 관청인 전함사(典艦司) 소속의 5품관으로, 1명이 전임관으로 임명되어 전라도와 충청도의 조창 업무를 모두 관장하였다.
17세기에는 여산에 나암창(羅巖倉)이 설치되어 군산창의 기능을 분담하였다. 그리고 17세기 중~후반부터는 옛 득성창이 있었던 용안에 성당창(聖堂倉)이 신설되어 나암창을 역할을 대신하였다. 그에 따라 조선 후기에는 군산창의 수세(收稅) 구역이 축소되었다. 19세기 초반에 편찬된 『만기요람』에 따르면, 성당창은 남원, 금산 등 8개 고을, 군산창은 전주, 옥구 등 7개 고을의 세곡을 수납하여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군산창에는 원래 조운선 17척과 조군(漕軍) 816명이 배정되어 있었는데, 이후 조운선이 23척으로 늘었다가 19척으로 다시 줄어들었다. 1697년(숙종 23)부터는 전라도의 도사(都事)가 해운판관을 겸임하여 군산창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1779년(정조 3)에는 전라도 해운판관을 혁파하고, 군산포진의 첨절제사(僉節制使)가 군산창에서의 조운 업무를 겸임하도록 하였다. 19세기에는 조세의 금납화가 일반화되면서 세곡 운송의 필요성이 점차 감소하게 되었다. 19세기 말이 되면 조운과 조창은 사실상 폐지의 운명을 맞게 되었으며, 군산창 역시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군산창은 용안 득성창을 대신하여, 1512년 금강 하구에 금강 수계의 유일한 조창으로 설치되었다. 당초에는 전주와 남원, 금산 등 20개 고을의 조세를 수납하여 경창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성당창이 신설되어 군산창의 기능을 분담하였고, 조세를 면포나 동전으로 내는 지역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19세기 초반 경 군산창의 수세 구역은 전주 등 7개 고을로 축소되었다. 비록 처음 설치되었을 때보다는 역할이나 비중이 다소 축소되었지만, 조운제도가 운영되었던 19세기 말까지 군산창은 전주와 주변 지역의 세곡을 수납하여 경창으로 운송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던 조창으로 기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