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으로 불타버린 창덕궁을 광해군 때 복구는 하였으나, 광해군은 창덕궁에서 일어났던 사건과 일부 풍수지리가의 말을 믿고 불길하게 생각하여 이어(移御)를 망설였다.
광해군은 경기도 파주시 교하(交河)에 신궁을 건설하려 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간 뒤, 1616년성지(性智)라는 승려가 풍수지리설을 들어 인왕산 아래가 명당이므로 이곳에 궁전을 지으면 태평성대가 온다고 주장하자 이 말에 따라 이 곳에 궁터를 잡게 한 뒤 그 이듬해부터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공사 도중에 새문동(塞門洞 : 지금의 종로구 신문로일대)에 왕기(王氣)가 있다는 설이 나돌자, 광해군이 이를 누르기 위하여 궁궐을 짓게 한 것이 경덕궁(慶德宮, 또는 경희궁)이었다. 이에 따라 인경궁공사는 거의 중단되다시피하여 1621년부터 본격적인 공사가 계속되었으나 1623년에 일어난 인조반정으로 건설공사는 중지되었다.
인경궁은 경희궁에 비하여 규모가 큰 궁궐이었다. 그런데 병자호란 뒤 1648년(인조 26)에 청인(淸人)들의 요구로 홍제원(弘濟院)에 역참(驛站)을 만들 때 청나라 사신들의 숙소 등의 건물을 새로 짓기 위하여 인경궁과 태평관의 건물을 허물어 재목과 기와를 사용하였으므로, 이 후부터 인경궁의 자취는 사라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