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일에 한자가 연희궁(延禧宮)으로 바뀌어 오늘날 연희동(延禧洞)의 동명이 되었다. 『궁궐지(宮闕志)』에 “도성 밖 서쪽 15리 양주(楊州)에 있는데 정종이 왕위를 선양하고 나서 이 궁에 머물렀다.”라고 소개하고 있으나 궁터는 찾을 수 없다.
연희궁은 왕실의 액운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지은 이궁으로서 세종이 부왕인 태종을 위해 1420년(세종 2)에 중건하였고, 세종 자신도 왕 8년에 잠시 머무르다가 그 이듬해에 창덕궁으로 돌아가는 등 자주 이곳에 들렀다. 그러나 당시에 이 궁은 해충과 독사가 많아 신하들이 어행 또는 어거를 만류하였다.
세종은 연희궁에 국립양잠소격인 잠실도회(蠶室都會)를 설치했고, 그 뒤 세조도 이곳을 서잠실(西蠶室)이라 하고 상의원(尙衣院) 소속의 정5품 별좌(別坐) 2인을 배치하여 관리하게 하였다. 한편, 연산군이 1505년(연산군 11)에 연희궁을 개축하여 연회장으로 꾸며놓고 놀이를 하게 되자 ‘연희궁 까마귀골 수박 파먹듯 한다.’라는 속담이 생겼다.
연희궁은 이로부터 이궁으로서의 지위는 상실되었다. 전각들이 어느 때 없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영조실록』에 의하면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이씨(暎嬪李氏)의 묘 수경원(綏慶園)을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