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만식은 일제강점기 「인형의 집을 나와서」·「탁류」·「레디메이드 인생」 등을 저술한 소설가이자 극작가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922년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제일와세다고등학원에 입학했으나, 중퇴했다. 1924년 단편 「새길로」를 『조선문단』에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했다. 조선일보사·동아일보사·개벽사 등의 기자로 활동했으나, 1936년 이후는 창작 생활만을 했다. 총 290여 편에 이르는 장편·단편소설과 희곡·평론·수필을 썼다. 채만식은 풍자적 수법으로 식민지 상황의 현실을 반영하고 역사적·사회적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1902년 전라북도 옥구 (현,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에서 출생했다. 유년기에는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했고, 임피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18년 상경하여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 1922년 졸업했다. 그해 일본에 건너가 와세다대학 부속 제일와세다고등학원에 입학했으나, 1923년 중퇴했다.
그 뒤 조선일보사 · 동아일보사 · 개벽사 등의 기자로 전전했다. 1936년 이후는 직장을 가지지 않고 창작 생활만을 했다. 1945년 임피로 낙향했다가 다음해 이리로 옮겨 1950년 그곳에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1924년 단편 「새길로」를 『조선문단』에 발표하여 문단에 데뷔한 뒤 290여 편에 이르는 장편 · 단편소설과 희곡 · 평론 · 수필을 썼다. 특히 1930년대에 많은 작품을 발표했으며, 대표작이라고 할 만한 것들도 이 시기에 발표되었다.
장편으로는 「인형의 집을 나와서」(1933) · 「탁류 濁流」(1937) · 「천하태평춘 天下太平春」(1938. 1948년 동지사(同志社)에서 단행본으로 출판될 때 ‘태평천하(太平天下)’로 개제) · 「금(金)의 정열」(1939) · 「아름다운 새벽」(1942) · 「어머니」(1943) · 「여인전기」(1944) 등이 있으며,
단편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레디메이드 인생」(1934) · 「치숙 痴叔」(1938) · 「패배자의 무덤」(1939) · 「맹순사」(1946) · 「미스터 방(方)」(1946) 등을 들 수 있다. 희곡으로는 「제향날」(1937) · 「당랑(螳螂)의 전설」(1940) 등이 대표적이다.
그의 작품 세계는 당시의 현실 반영과 비판에 집중되었다. 식민지 상황 아래에서 농민의 궁핍, 지식인의 고뇌, 도시 하층민의 몰락, 광복 후의 혼란상 등을 실감나게 그리면서 그 근저에 놓여 있는 역사적 · 사회적 상황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작품 기법에 있어 매우 다양한 시도를 했는데, 특히 풍자적 수법에서 큰 수확을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1942년 조선문인협회가 주관한 순국영령방문행사에 참석하고, 그 결과로 『춘추』 등에 발표한 산문과 1943∼1944년에 『 매일신보』 등에 발표한 산문과 소설을 통해 징병, 지원병을 선전, 선동했다.
또한 1943∼1944년에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주관하는 예술부문 관계자 연성회 , 보도특별정신대, 생산지 증산 위문 파견 등 친일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1960년대 말까지는 그에 대한 연구가 드물었으나 1970년대에 들어와 그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연구 업적도 급격히 많아졌다. 1970년대에는 중편소설 「소년은 자란다」 · 「과도기」, 희곡 「가죽버선」 등을 비롯한 많은 유작들이 발굴, 공개되기도 했다.
그 자신이 쓴 「자작안내 自作案內」(靑色紙 5호, 1939)는 그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그의 작품은 『채만식전집』(創作과 批評社, 1989)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채만식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 · 13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7: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602∼639)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1984년 월명공원에 백릉 채만식선생 문학비 건립, 1996년 채만식소설비 건립, 2001년 채만식문학관 개관, 2002년 소설비 추가 건립, 2002년 채만식문학상 제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