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사적로 지정되었다. 백제 성왕이 538년 봄, 지금의 부여인 사비성으로 도읍을 옮기면서 도성 안을 중앙 동 · 서 · 남 · 북 등 5부로 구획하고 그 안에 왕궁과 관청, 사찰 등을 건립할 때 나성으로 에워싸인 사비도성의 중심지에 정림사가 세워졌다. 정림사와 왕궁의 관계는 중국의 북위(北魏) 낙양성(洛陽城) 내의 황궁과 영녕사(永寧寺)의 관계와 흡사하여 사비도성의 기본구조가 북위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1층 탑신 표면에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기념비적인 내용이 새겨져 있어, 정림사는 백제 왕실 또는 국가의 상징적 존재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은 백제인의 감성이 고스란히 담겨진 석탑이지만, 초층 하부에 있는 소정방(蘇定方)의 평제기공문(平濟紀功文), 즉 소정방이 백제를 멸한 기념으로 새긴 글로 인해 오랜 기간 동안 ‘평제탑(平濟塔)’으로 불렸다. 그러나 1942년 일본인 후지사와 가즈오(藤澤一夫)가 절터 발굴조사 중에 발굴한 기와조각에 ‘태평팔년무진정림사대장당초(太平八年戊辰定林寺大藏當草)’란 명문이 적혀 있어, 태평 8년인 고려 현종 19년에 정림사로 불리웠음을 알게 되었다. 이후 ‘정림사지’와 ‘정림사지 오층석탑’으로 불리게 되었다.
1979년과 1980년 2년에 걸쳐 충남대학교박물관에서 전면 발굴조사하여 가람(伽藍)의 규모와 배치, 1028년에 중건된 사실 등이 드러났으며, 다수의 소조인물상편(塑造人物像片)과 백제시대 · 고려시대의 막새기와편 및 백제시대의 벼루 · 삼족토기(三足土器) 등이 출토되었다. 2008년∼2010년에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사역(寺域) 전체를 다시 발굴하여 기존의 조사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한 회랑 북단의 동서승방지와 강당지 뒤편의 북승방지를 확인하였다.
현재 절터에는 백제시대의 석탑인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1962년 지정)과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높이 5.62m의 석불인 부여 정림사지 석조여래좌상(보물, 1963년 지정)이 남아 있어 백제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계속 법통이 이어져 왔음을 알 수 있다. 중문 · 탑 · 금당 · 강당이 남북 자오선상에 일직선으로 놓이고 강당 좌우의 부속건물과 중문을 연결하는 회랑(廻廊)이 둘러싸고 있는 ‘일탑식가람(一塔式伽藍)’ 배치이다. 이는 정림사뿐만 아니라 부여에서 발견된 다른 사찰에도 확인되므로 백제 사비시대의 전형적인 가람배치 양식이라 할 수 있다. 단, 정림사지는 북쪽이 넓은 사다리꼴 평면이다. 중문 밖에는 동 · 서 양쪽으로 각각 연못을 파서 다리를 통하여 건너가게 하였다. 이 연못은 현재까지 발굴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이므로, 삼국시대 사찰 조경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최근 발굴 결과 드러난 강당 및 금당 좌우로 회랑과 연결된 부속 건물 배치 형식은 부여 능산리사지(567년)와 부여 왕흥사지(577년)에서도 확인된 바 있어 백제 가람배치의 전형적인 모습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에 따라 금강사지 등 다른 형식의 가람배치로 보고된 사지에 대한 재검토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중국 북위(北魏) 낙양(洛陽)의 영녕사(永寧寺)나 일본 호류지(法隆寺) 5층목탑의 탑내 소상 사례에 비춰볼 때 정림사지 기와구덩이에서 출토된 소조상들은 목탑 내부에 안치됐던 것들로 추정되므로 정림사지 5층석탑 건립 전에 5층목탑이 존재했다는 주장도 제기되어 있다.
백제 사비시기의 대표적인 사찰 터인 정림사지는 백제시대의 가람배치와 건물기단 · 기초, 석탑 조영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