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송국리 선사 취락지는 충청남도 부여군 초촌면에 있는 우리나라 청동기시대를 대표하는 대규모 취락유적이다. 1974년 비파형동검이 부장된 돌널무덤을 통해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후 총 25차에 걸친 학술 발굴이 진행되면서 대지 조성 흔적, 대지 구획 시설, 목주 열, 대형 굴립주 건물지와 같은 특징적인 유구 및 시설이 확인되고 있다. 부여송국리선사취락지에서 찾은 집터와 무덤, 토기와 석기 등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중기 문화를 대표하는 이른바 송국리 유형으로 설정되어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부여 송국리 선사 취락지(扶餘 松菊里 先史 聚落址)는 1974년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과 청동끌, 간돌검, 돌화살촉, 대롱옥, 곱은옥 등이 부장(副葬)된 1호 돌널무덤의 수습 조사를 통해 널리 알려졌다. 정식 학술 조사는 1975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 시작되어 1987년(제7차)까지 실시되었다.
1975년 첫 조사에서 청동기시대 집터를 비롯한 선사시대와 역사시대 유적들의 광범위한 분포가 확인됨에 따라 학술적 중요성이 인정되어 송국리 일원 535,107㎡가 사적 제249호로 지정되었다. 1991년부터는 국립공주박물관(제8차~제10차)과 국립부여박물관(제11차)이 연차 발굴을 진행하였다. 이후 2008년 제12차 조사부터는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고고학연구소가 전담하고 있는데, 2020년까지 제25차 조사가 이루어졌다.
송국리 일대는 해발 50m 내외의 완만하게 언덕진 산지에 자리한다. 북쪽으로는 언덕이 계속 이어져 산지와 연결되며, 남쪽으로는 넓고 평평한 지대가 발달해 있다. 유적 주변은 여러 작은 하천이 흐르며, 곳곳에 낮은 언덕땅과 충적 대지가 형성되어 있어 인간이 거주하기에 매우 적합한 환경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유적 내 각 지구 명칭은 1975년 농지확대개발사업지구 지정 당시의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남북 방향의 주 능선에 해당하는 5457지구에는 방형계 집터와 나무 기둥, 대형 건물지가 자리한다. 동남쪽의 가지 능선인 50지구와 서쪽의 가지 능선인 53지구와 55지구에서는 원형 집터가 분포한다. 무덤은 대부분 52지구와 53지구의 중앙 능선에 자리한다. 한편 5357지구 능선 정상부와 54지구의 설상 대지에서는 대지 조성 흔적이 확인된다. 언덕 비탈면의 흙을 깎아 바닥을 다졌으며 풍화 암반층을 깎거나 흙을 쌓아 평탄화된 지표면을 조성하였다.
2020년까지의 발굴 결과 집터 117기, 구덩이 107기, 소성(燒成) 유구 8기, 굴립주(掘立株) 건물지 11기, 나무 기둥 16기, 통나무 담장 20기, 주공렬 10기, 주공군 5기, 도랑 모양으로 만든 터 2기 등의 생활 유구와 돌널무덤 4기, 구덩무덤 7기, 독널무덤 7기 등의 분묘 유구가 확인되었다.
집터는 평면 형태에 따라 방형, 장방형, 세장방형, 원형, 타원형으로 세분된다. 방형계 집터는 장축 3m 미만의 소형에서 장축 14m 이상의 대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규모가 확인된다. 원형계 집터와 달리 바닥면에 화덕자리를 시설한 것들이 다수 확인된다. 원형계 집터는 직경 3~5m 정도의 크기이며 바닥 면 중앙에는 타원형 구덩이와 기둥구멍이 시설되어 있다.
전체 117기 중 방형계가 68기로 원형계에 비해 우위를 점한다. 방형계 집터는 취락지 주 능선 평평한 지면에 있는 데 반해, 원형계 집터는 언덕 비탈진 곳에서 발견된다. 양자를 집단이나 기능의 차이로 보는 견해와 함께 선후 관계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아직 뚜렷한 근거를 찾지 못하였다.
대형 건물지는 모두 3기가 조사되었는데 54지구 설상 대지에서 2기, 52지구와 53지구 사이에서 1기가 확인되었다. 과거 54지구의 유구는 취락의 방어 시설인 목책(木柵)으로 보았으나 이후 추가 발굴이 이루어지면서 11×1칸 구조의 굴립주 지상 건물로 판명되었다. 규모는 각각 19.8m×3.4m, 23.4m×3.4m 크기이다. 3호는 주 능선 서쪽 경사진 지면의 평평한 곳에 자리한다. 규모는 5.3m×3.2m 크기로 1호와 2호에 비해 다소 작은 편이다.
나무 기둥은 5457지구 일대에서 확인되었는데 주로 2열의 주공이 쌍을 이루며 진행된다. 특히 언덕 꼭대기 평탄화된 지표면에서는 서쪽 4조, 동쪽 9조 등 13조의 나무 기둥이 200m 이상 이어진다. 나무 기둥 또한 과거에는 5457지구의 주 능선을 방어하는 목책 시설로 추정되었지만, 54지구의 목책열이 대형 굴립주 건물지로 밝혀졌고, 나무 기둥이 57지구까지 연장되는 양상이 확인됨에 따라 더 이상 목책 시설로 보기 어렵다는 의견이 개진되고 있다. 나무 기둥의 성격을 확정하기에는 아직 더 많은 자료가 확보되어야 하겠지만, 현재로서는 대형 굴립주 건물이나 건조물일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폭이 좁은 도랑 내부에 나무 기둥을 세워 만든 울타리 구조인 통나무 담장은 대지 구획 시설로 추정되는데, 1 · 2호 대형 건물지와 3호 대형 건물지 주변, 언덕 윗부분 평평한 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무덤이 자리한 52지구와 53지구 중앙 능선은 부여송국리선사취락지의 중심 묘역으로 설정되고 있다. 돌널무덤, 돌뚜껑움무덤, 독널무덤 17기가 확인되었다. 부장품으로는 무기류와 공구, 토기류, 장식품 등이 있는데, 이를 통해 무덤에 매장되어 있는 사람의 사회적 신분이나 위계를 가늠할 수 있다.
집터와 구덩이,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청동기와 토기, 석기가 있다. 청동기는 동검과 동끌이 있는데 모두 1호 돌널무덤에서 발견되었다. 토기는 민무늬토기와 붉은간토기로 구분된다. 송국리식의 독과 항아리, 바리, 단지, 뚜껑 등의 민무늬토기가 절대 다수를 점하지만, 겹아가리짧은빗금무늬토기와 골아가리무늬토기도 소량 발견되었다. 붉은간토기로는 플라스크형, 바리 모양, 사발 모양 등이 있으며, 두귀달린 붉은간토기도 일부 발견된다. 한편 덧띠토기 단계에 속하는 굽다리접시 모양의 토기와 검은간토기도 수습되었다.
또한, 간돌검, 간돌창, 간돌화살촉, 바퀴날도끼, 돌도끼, 홈자귀, 돌낫, 간돌칼, 대팻날, 돌끌, 숫돌, 갈판, 공이, 가락바퀴, 거푸집 등 많은 석기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외에도 대롱옥과 굽은옥, 토제구슬과 같은 장신구도 확인된 바 있다.
부여송국리선사취락지는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학술적 토대를 제공하였다. 이와 동일한 문화상을 갖는 유적 및 유물 복합체는 이른바 송국리 유형으로 설정되어 편년을 비롯한 다양한 고고학적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내부 중앙 바닥면에 타원형 구덩이와 기둥구멍이 설치된 송국리식 집터, 외반된 구연부와 긴달걀꼴의 동체부 그리고 축약된 저부 기형의 송국리식 토기, 대야바닥의 플라스크형 붉은간토기, 삼각형돌칼과 홈자귀, 돌널무덤 · 돌뚜껑움무덤 · 독널무덤의 송국리형 묘제, 부채 모양 청동도끼의 거푸집 등은 송국리 유형을 구성하는 유구 · 유물이다.
부여송국리선사취락지에서는 많은 양의 쌀과 조, 밀, 기장, 콩, 팥 등의 작물과 잡초류 종자가 확인되었다. 곡물 자료와 수확 도구, 저장시설, 수많은 집터와 건물지 같은 구조물을 통해 볼 때 벼농사를 중심으로 다양한 작물을 재배한 중기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농경 취락으로 평가할 수 있다.
부여송국리선사취락지는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편년, 생계 경제, 취락, 사회구조 연구에서 새로운 획기를 마련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건축, 농경, 수공업, 분묘, 의례 등 과거 생활문화사를 복원하는 데 있어 수많은 고고학적 자료를 제공하였다.
극히 일부만이 발굴되어 현재로서는 취락의 전체적인 모습을 복원하기 불가능하며 여전히 수많은 연구 과제가 남아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유적의 전체적인 범위와 유구 분포를 파악하기 위한 시굴 조사가 먼저 해결되어야 하며, 학술 발굴도 계획적이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