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국리 문화 ( )

선사문화
개념
원형 집터와 송국리형 토기를 지표로 하는 한국 청동기시대 중기의 대표적인 문화. 송국리유적.
내용 요약

송국리 문화는 원형 집터와 송국리형 토기를 지표로 하는 한국 청동기시대 중기의 대표적인 문화이다. 1975년부터 발굴한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유적에서 둥근 집터와 송국리형 토기가 출토되면서 청동기시대 중·후기를 대표하는 문화로 알려졌다. 농경의 본격화와 집약화에 따라 가족공동체에서 분가된 세대공동체가 주거 단위로 분화하고, 마을 규모가 확대되고 환호 등 방어시설을 갖춘 취락이 등장하였다. 특히 집자리 내부에 타원형 구덩이, 2개의 중심 기둥, 4개의 기둥 등이 필수적으로 설치되어 있다. 충청·전라·경상 지역과 제주도는 물론 일본 구주 지역까지 넓게 분포하고 있다.

정의
원형 집터와 송국리형 토기를 지표로 하는 한국 청동기시대 중기의 대표적인 문화. 송국리유적.
연원 및 변천

1975년부터 1980년대까지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유적의 발굴조사에서 둥근 집터와 ‘송국리형 토기’가 확인되면서 하나의 문화 유형으로 알려졌다. 송국리문화는 중앙에 타원형 구덩이가 있고 타원형 구덩이의 양단에 2개의 기둥구멍이 설치된 원형 집자리와 축약된 저부에 동체부가 밖으로 둥글게 부풀다가 약간 축약되어 외반된 구연부로 연결된 민무늬토기(無文土器)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주거지 형태는 광주 송암동, 서산 휴암리, 영암 장천리, 거창 대야리 유적 등이 조사되면서 송국리문화의 성격이 보다 명확하게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송국리형 집자리의 내부시설 중 타원형 구덩이, 2개의 중심 기둥, 4개의 기둥 등은 송국리형집자리의 필수적인 요소라 할 수 있는데, 그 형식 분류에 대해서는 타원형 구덩이와 기둥의 위치 등의 내부시설에 비중을 두는 관점과 집자리 평면형태를 함께 살피려는 관점으로 구분된다. 즉, 타원형 구덩이 내부에 2개의 기둥구멍이 있는 것은 휴암리형(休岩里型)집자리로, 타원형 구덩이 외부에 2개의 기둥구멍이 있는 것은 검단리형(檢丹里型)집자리로 세분하기도 한다. 송국리문화는 서기전 8세기에서 서기전 4세기 사이로 알려져 있으나 광주 신창동 유적, 순천 연향동 대석 유적, 제주 삼양동 유적 등지의 송국리문화는 서기 전후 시기까지 잔존하고 있다.

내용

중앙의 타원형 구덩이 양단에 2개의 기둥구멍이 설치된 원형 집자리와 송국리형토기로 특징되는 송국리문화는 청동기시대 전기와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청동기시대 중 · 후기의 대표적인 문화유형이며, 조사된 유적명을 따라 송국리문화라 지칭되었다. 송국리문화는 무덤으로 고인돌[支石墓]뿐만 아니라 돌널무덤[石棺墓], 움무덤[土壙墓], 독무덤[甕棺墓] 같은 새로운 묘제의 등장과 송국리형토기, 플라스크형 적색마연토기 등 토기군의 구성이 단순해지며, 삼각형돌칼[三角形石刀], 홈자귀[有溝石斧], 일단병식석검, 일단경식석촉 등 석기유물 구성에서도 변화가 나타난다. 송국리문화의 형성에 대해서는 학자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는데 크게 자체 발생설과 외래 기원설로 구분된다. 자체발생설은 전기 청동기시대 문화가 점진적인 변화와 발전과정을 거쳐 송국리문화로 형성된 것이며, 외래 기원설은 한반도 외부에서 완성된 형태의 송국리문화가 금강유역에 들어와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양자의 관점 차이의 핵심 중 하나는 전기 청동기시대의 장방형 집자리와 송국리문화의 원형 집자리의 중간적 형태를 띠고 있는 이른바 휴암리식 집자리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차이가 난다. 즉 자체 발생설은 휴암리식 집자리를 시간적으로 전기 청동기시대 장방형 집자리와 송국리식 원형 집자리의 변화를 잇는 시간적 연결 고리로 파악하고 있는데, 휴암리식 주거지에서는 송국리문화의 표지적 문화요소와 전기문화요소가 함께 확인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반면, 외래기원설은 이러한 전기문화요소를 외부에서 유입된 송국리문화가 금강유역에서 형성되어 주변지역으로 확산되면서 재지계 전기 청동기문화간의 문화접변의 결과로 보고 있다.

송국리문화의 분포범위는 주로 충청, 전라, 경상 지역에 분포하며, 안성천 이북의 경기지역과 강원지역, 그리고 영남 동부지역에서는 발견 예가 드물다. 특히 금강유역의 충청지역과 호남지역이 중심 분포권으로 이 지역이 최초의 송국리문화가 발생한 지역으로 보고 있다. 영남지역의 경우 남강유역이 중심분포권이며, 울산지역을 포함한 동남해안지역을 제외한 영남 전 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다. 또한 최근 발굴조사를 통하여 중부지역에서도 일부 확인되고 있는데, 북으로는 강원도 최북단인 고성지역에서도 확인되고 있으나 그 수는 극히 적다. 남으로는 제주도는 물론 일본 구주지역까지 넓게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송국리식 취락의 입지는 농경이 용이한 강변 충적지나 낮은 구릉지가 선택되었으며, 이는 집약적인 수전농경에 따른 입지선택이다. 송국리유적에서 출토된 탄화미와 논산 마전리 · 보령 관창리 등 논농사와 관련된 유적이 확인되어 송국리문화가 농경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송국리문화의 여러 구성요소 가운데 경제활동의 변화가 가장 큰 특징이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저지대를 개간하여 논농사를 영위하는 새로운 기술체계가 송국리문화 단계에 들어서 본격화된 것으로 보고 있다.

송국리문화의 등장은 사회경제적 변화와 궤를 같이하는데, 가족공동체를 기본으로 하는 청동기시대 전기의 취락구조와는 달리 농경의 본격화와 집약화에 따라 가족공동체에서 분가된 세대공동체가 중심이 된 주거단위의 분화가 이루어지며, 마을 규모의 확대, 환호 등 방어시설을 갖춘 마을의 본격적 등장, 유적의 기능분화, 마을내외의 위계의 형성 및 사회복합화의 증가 등의 증거가 일련의 물질적 변화와 동시에 나타난다. 이 시기 사회위계의 형성은 생계경제상으로는 논농사의 본격적인 도입을 통한 잉여생산물의 증가와 좋은 농경지의 확보를 위해 집단 간의 긴장도가 증가되면서 노동력의 통제와 농경의 관리, 공동행사 등을 위해 보다 강력한 통제자 혹은 집단이 등장하게 되면서 환호시설 등 방어시설을 갖춘 취락이 등장하게 된다. 송국리문화는 청동기시대 중 · 후기를 대표하는 문화로 남부지역 전역에서 확인되며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다 서기전 4세기를 전후하여 남부지역에서는 소멸되지만, 제주지역에서는 서기 이후 철기시대까지 나타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송국리문화는 청동기시대 중 · 후기를 대표하는 문화유형으로 충청 · 전라 · 경상 지역과 제주도는 물론 일본 구주 지역까지 넓게 분포하고 있다. 최근 경기 남부 지역에서도 송국리형 집자리의 발굴사례가 증가하고 있으나 안성천 이북의 경기지역과 강원지역, 그리고 영남 동부지역에서는 드물게 발견된다. 송국리문화의 등장은 청동기시대 전기의 취락구조와는 달리 농경의 본격화와 집약화에 따라 세대공동체가 중심이 된 주거단위의 분화, 마을 규모의 확대, 환호 등 방어시설의 등장 같은 사회경제적 변화와 반영한다.

참고문헌

「금강유역 송국리형 묘제의 연구」(김승옥, 『한국고고학보』45, 2001)
「송국리형토기에 대한 일고찰」(조현종, 홍익대 석사논문, 1989)
「송국리형 주거지에 대한 연구」(이종철, 『호남고고학보』12, 2000)
『송국리형 주거분류시론』(이건무, 일조각, 1992)
『송국리』Ⅰ, Ⅱ, Ⅲ, Ⅳ, Ⅴ(국립중앙박물관, 1979, 1986, 1987, 1991, 1993)
『한국의 선·원사토기』(국립중앙박물관, 1993)
『호서지역의 청동기문화』 (충남대학교박물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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