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돌과 주거지는 1984∼1986년에 목포대학박물관이 발굴조사하였다. 서호면 면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약 500m 떨어진 장천리 괴음마을 앞 도로변에 선사주거지가 있고, 그 서남쪽 60m 지점에 고인돌군이 있다. 낮은 산들이 이 유적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데, 서쪽은 은적산(隱積山), 남쪽은 그 지맥(支脈)이 감싸고 있고, 북쪽은 철암산(鐵巖山)이 있다. 다만 동북쪽으로는 엄길리마을과 저수지가 있어 평지를 이룬다. 주변에는 수많은 고인돌이 산재해 있다.
고인돌은 장천리만 해도 5개 군에 52기가 있는데, 목포대학박물관이 1984년 5월 4일부터 6월 1일 사이에 장천리 괴음마을 고인돌 B군(群)을 조사하였다. 총 11기 중 도로에 접한 4기만 발굴조사하였고, 나머지는 그대로 보존하였다.
발굴된 지석묘는 남쪽에서부터 제1·2·3·4호로 명명하였다. 지석묘의 개석크기는 170㎝×110㎝×30㎝에서부터 370㎝×280㎝×80㎝였으며, 유구의 규모는 155㎝×60㎝×40㎝에서 180㎝×44㎝×30㎝였다. 장축의 방향은 북남쪽이었다. 주요 출토품으로는 1호에서 숫돌·칼자루끝장식[劍把頭飾]·세형동검편(細形銅劍片) 등이 나왔으며, 3호에서는 홈자귀[有溝石斧]가 나왔다.
선사주거지는 영암군 서호면 장천리 378-3번지의 논에서 발굴하였다. 고인돌과 주거지는 지형적으로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어 낮아지는 평지에서 고인돌군은 서남쪽, 주거지는 동북쪽에 위치하며, 서로 60m 떨어져 있다. 이곳에서 주거지가 발견된 것은 예상 못했던 일이며, 지석묘 발굴 중 유물수습지를 확인하다가 우연히 발견하여 발굴하게 되었다. 장천리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원형 내지 타원형이고 중앙에 얕은 구덩이가 있으며, 그 양단에 기둥구멍이 있고 벽선에 따라 작은 주혈이 발견된다. 노지(爐址)나 출입시설이 없다.
장천리주거지의 연대는 출토유물과 성격이 유사한 송국리유적의 연대를 기준으로 서기전 5∼3세기 경으로 보고, 고인돌의 연대는 출토유물에 의해 서기전 4∼3세기 경으로 비정한다.
그런데 세형동검·칼자루끝장식·숫돌 등 부장품으로 볼 때, 서기전 300∼200년경이 될 수 있고, 세형동검과 공반되어 잘 나타나는 삼각형돌화살이 없고 검은간토기목긴항아리[黑陶長頸壺]·점토띠토기[粘土帶土器]와 같은 후기 민무늬토기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세형동검과 검파두식을 부장품으로 보지 않으면 서기전 300∼200년 이전으로 볼 수 있다.
장천리와 같은 성격의 주거지는 충청남도 서산군 해미읍 휴암리, 충청남도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 광주광역시 서구 송암동, 경상남도 거창군 대야리 등 한반도 서남부지역에도 나타난다. 이는 타지역과는 다른 특색으로 ‘송국리형문화권(松菊里型文化圈)’의 설정을 가능하게 한다.
송국리형집자리의 개념은 크게 두가지 측면에서 이해된다. 하나는 부여 송국리유적에서 확인된 원형 집자리처럼 집자리의 평면형태가 원형을 이루며, 집자리 중앙에 타원형구덩이와 양측에 2개의 중심기둥, 집자리 내부에 4개의 기둥을 설치하는 형태만을 지징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평면형태를 원형에만 국한하지 않고 타원형구덩이와 2개의 중심기둥, 4개의 기둥 등이 어우러져 설치되는 방형의 집자리 형태도 포함하는 것이다.
송국리형집자리의 분포는 대체로 경기도·강원도와 낙동강 상류역을 제외하면 남한 전역에서 고루 발견된다.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송국리형집자리의 북한계는 안성천 이남으로 알려져 있으며, 남쪽으로는 제주도에까지 이른다. 특히 금강유역 중하류지역은 송국리형문화의 기원지로 파악한다.
송국리형문화의 편년은 부여 송국리유적에서 출토한 비파형동검과 부채모양청동도끼[扇形銅斧]와 거푸집[鎔范] 등을 통해 서기전 6∼4세기의 연대관이 지배적이다. 최근에는 토기 유물의 형식학적인 연구성과와 방사성탄소연대결정법에 의거하여 서기전 8세기까지 상향조정하고 있다. 송국리형문화의 하한연대는 세형동검과 덧띠토기가 출현하는 서기전 4세기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후 계속되는 발굴로 인해 기원을 전후한 시기까지 송국리형문화가 잔존했음을 알 수 있다.
이곳 주거지에 생활하였던 주민들의 무덤은 고인돌이었을 것이며, 그들의 생활상은 어로보다는 농경이나 수렵에 치중하였다고 본다. 그리고 토기 및 석기류는 자체 제작하였으나 청동기는 외부로부터 수입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세형동검과 칼자루끝장식은 한반도에 몇 예가 되지 않는 출토품이고, 청동기 후기의 표지유물로서 고인돌 축조연대를 추정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