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성(子誠), 호는 평암(平庵). 아버지는 권신(權藎)이다. 대대로 봉화에서 살았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이광정(李光庭)·강재항(姜再恒)을 사사하였다.
1754년(영조 30) 사마시에 합격하고, 1757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영조의 신임을 받아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에 제수되었고, 장헌세자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때 성심으로 세자를 잘 받들고 가르쳐서 세자의 신임을 독차지하였다.
1762년 형조판서 나경언(羅景彦)이 세자를 무고하자, 영조가 크게 노해 세자를 책망하였다. 이때 세자궁의 관원이 모두 물러났지만, 권정침과 사서 임성(任珹), 검열 임덕제(林德躋)만이 세자를 배종하고 왕 앞에 나가 세자의 무고함을 주청해 무사히 풀려나오게 하였다.
그러나 다음 달에 영조가 세자를 폐해 서인으로 하고 뒤주에 넣어 죽게 하자, 이를 극력 반대하다가 형장에까지 끌려갔다. 그러나 영조의 특지(特旨)로 풀려 나와 고향으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그 뒤 정조가 즉위, 여러 번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여생을 고향에서 보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추모해 『현궁지(玄宮誌)』를 지을 때 권정침의 사적도 넣고자 하였다. 그러나 영조가 사도세자의 신원을 하지 못하도록 해놓았으므로 할 수 없이 세자의 인적 사항만 기록해 넣었다.
은거하는 동안에 『연설기사(筵說記事)』·『서연강의(書筵講義)』·『중용총론』·『근사록강의』·『사단칠정변(四端七情辨)』 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1878년(고종 15) 현손 권영하(權泳夏)가 저서와 문집을 모아 『평암문집』으로 출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