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덕자리는 신석기시대부터 삼국시대 초기까지 사용된 난방과 취사, 조명을 겸용했던 주거시설이다. 신석기시대에 집터나 야외에 흙이나 돌을 돌려 화덕을 만들어 취사와 난방을 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화덕은 구조에 따라 아무 시설이 없는 것, 간단한 토광(土壙) 형태의 것, 가장자리를 따라 점토띠를 두른 것, 토광을 파고 그 가장자리에 돌을 돌린 것, 바닥에 강돌을 깔고 주위에 돌을 돌린 것, 부뚜막 형태의 것 등 여러 가지로 나뉜다. 원삼국시대부터 부뚜막·쪽구들이 등장하면서 취사와 난방을 겸한 온돌문화가 시작되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화덕은 그 구조에 따라 아무 시설이 없는 것, 간단한 토광(土壙) 형태의 것, 가장자리를 따라 점토띠를 두른 것, 토광을 파고 그 가장자리에 돌을 돌린 것, 바닥에 강돌을 깔고 주위에 돌을 돌린 것, 부뚜막 형태의 것 등 여러 가지로 나뉜다. 신석기시대에는 위원 용연동 2호집자리의 화덕처럼 간단한 토광 형태의 화덕과 가장자리를 따라 점토나 돌을 돌린 형태의 화덕이 전국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서포항 9호집자리와 같이 바닥에 강돌을 깐 형태의 것도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이른 시기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돌을 돌린 것이 주로 사용되다가 중기 이후에는 토광형 화덕이 많이 제작되었다. 화덕은 주로 집자리의 정 중앙에 1개씩 설치되는 것이 보통이지만, 주거지의 크기에 따라 2개, 5개(서포항 9호집자리) 등 다수의 화덕이 설치된 것도 있다. 한편 서 · 남해안의 소규모 패총을 중심으로 확인되는 일시적 야영지와 같은 곳에서는 둥글게 돌이 깔린 야외노지가 여러 기씩 군집되어 나타나기도 한다.
청동기시대에는 토광형과 토광 주위에 돌을 돌린 형태의 화덕이 주로 사용되었다. 토광형 화덕은 전국적으로 나타나는 가장 일반적인 화덕으로, 서북한 지방의 팽이형토기 출토 집자리와 남한의 흔암리 · 역삼동 유형의 집자리에 설치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토광 주위에 돌을 돌린 형태의 화덕은 신석기시대의 것이 원형인데 비해 장방형 또는 방형인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유형은 미송리형토기 분포권의 주거지와 남한의 가락리 유형 집자리 등 이른 시기 집자리에서 자주 확인된다.
청동기시대 중 · 후기의 송국리형 집자리에는 화덕이 없는 것이 특징인데, 집자리 외곽에 설치된 야외 화덕에서 공동취사를 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화덕은 방형 또는 장방형 집자리의 중앙 축선 상에 같은 간격으로 배치되었는데, 집자리의 크기가 커지면서 화덕의 수도 많아져, 많게는 8개의 화덕이 있는 경우도 있다. 신석기시대의 화덕이 집자리의 정중앙이나 입구 쪽에 설치된 반면, 청동기시대에는 입구의 반대 쪽에 설치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원삼국시대에는 이전 시기 화덕의 전통이 이어져 집자리 내부 안쪽으로 치우쳐서 바닥에 돌을 깔고 주위에 점토띠를 두른 노지가 설치되는 경우가 많으며, 새로 부뚜막 형태의 화덕이 나타나 전국적으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부뚜막형 화덕의 평면형태와 구조는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한강 유역의 여(呂)자 · 철(凸)자, 육각형주거지에서는 부뚜막에 점토와 돌로 만든 일(一)자 또는 벽을 따라 설치된 ‘ㄱ자’형의 쪽구들이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주거지와 쪽구들은 북방 부여의 소산인 연해주 지역의 단결-끄로로노브카 문화의 영향으로 파악되고 있다.
부뚜막과 쪽구들은 이후 경기 · 호서 · 호남지역 등에서 백제 한성기(漢城期)의 장방형, 방형주거지에도 채용되며, 일부 대형 주거지를 중심으로 토제 아궁이테가 장식되기도 하였다. 한편 영남지역에서는 원삼국시대 전기부터 원형주거지에 벽을 따라 흙과 판석으로 만든 쪽구들이 나타나며, 원삼국시대 후기에는 방형 주거지에서 3벽을 따라 평면 ‘ㄷ자’형, 곡선형 등의 쪽구들이 일반화되어 가야 전기에 이르기까지 계승된다.
화덕자리의 변화과정과 주거 및 취락과의 관계는 당시 사람들의 식생활과 주거생활 양식을 파악할 수 있는 기초자료가 되고 있다. 특히, 신석기 · 청동기 · 원삼국시대 화덕자리의 구조 및 형태, 설치 위치 등의 제요소와 집자리 형태 및 출토 유물과의 대비를 통하여 시간적 · 지역적 문화유형과 문화변동 과정이 설명되기도 한다. 나아가 화덕자리를 단위로 한 집자리 내부의 공간 분석을 통하여 각 시대별 공동체의 가족 및 세대구성, 계층화 양상 등 사회구조를 복원하는데 유용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원삼국시대부터 나타나는 부석식 화덕과 부뚜막 · 쪽구들이 등장하면서 개별가족 단위의 취사와 난방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취사와 난방을 겸한 우리나라 온돌문화의 시원이 되었던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