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쌀·보리·수수·조 등의 곡물이 발견되어 유명해진 유적이다.
이 집터는 한강과 평행하는 긴 구릉에서 한강쪽으로 뻗은 지맥의 표고 123m 능선 위에 있으며, 이 지맥은 강가에서는 20∼30m의 절벽으로 되어 있다.
1962년에 이 곳 구릉에 토기와 석기들이 산포되어 있음이 알려져 1972∼1977년까지 서울대학교박물관과 고고학과에 의해 발굴 조사되었다. 모두 14기의 집터가 확인되었는데, 더 많은 집터의 존재가 예상된다.
집터는 지맥의 장축(長軸)과 직교각으로 만나는 남북장축의 장방형이 대부분이며 풍화된 화강암반을 ㄴ자로 파고 지붕을 씌운 것이다. 14기 중 3기는 구릉 동쪽 경사면에서, 나머지 11기는 서쪽 사면(한강쪽)에서 발견되었다.
집의 크기는 작은 것은 5m×2.5m, 큰 것은 10m×4m 정도이다. 기둥구멍이나 화덕자리가 없는 것도 있으나, 기둥구멍이 3열로 배치되어 맞배지붕을 시사하는 것도 있었고, 바닥에는 10㎝ 두께로 점토를 다지고 저장공(貯藏孔)을 가진 것이 있었다.
1977년에 발굴된 12호 집터는 북동-서남장축의 9.7m×3.7m 크기로, 모두 39개의 기둥구멍이 벽선과 중앙선에 3열로 배치되어 있었다. 3개의 화덕자리와 7개의 저장공이 있었다.
유물들은 주거 바닥에서 구멍무늬토기〔孔列土器〕 3점, 민무늬토기 4점, 붉은간토기 1점, 간돌검〔磨製石劍〕 4점, 반달돌칼 1점, 바퀴날도끼〔環狀石斧〕 1점, 돌도끼 4점, 외날돌도끼 4점, 돌살촉 10점 등이 발견되었다.
민무늬토기는 화분형 사발·단지·짧은목토기〔短頸壺〕 등이다. 구멍무늬토기는 아가리가 넓고 깊은 사발형이면서 아가리 아래쪽에 조그만 구멍이 1줄 뚫리고 아가리 윗면에는 톱날새김을 하고 있다. 붉은간토기는 고운 흙으로 만들어진 얇은 토기이며 파편뿐이어서 원형을 알기 어려우나, 다리가 홀쭉한 굽다리접시〔高杯〕모양으로 추측된다.
석기 중에는 돌도끼와 끌에 냇돌을 이용해서 만든 뗀석기가 있는 것이 주목되며 한강유역의 빗살무늬토기시대의 전통이 반영되고 있는 듯하다.
돌칼은 1단자루, 2단자루 두 형식이 모두 있으나 이른바 피홈식〔血溝式〕이 있는 것이 연대결정상 중요하다. 돌살촉에는 자루식〔有柄式〕·슴베식〔有莖式〕 두 종류가 있으며 모두 전형적인 청동기시대 형식이다.
한편, 토기 안의 흙 속에서는 탄화된 쌀(2알)·겉보리(2알)·조(1알)·수수(1알)가 발견되었다. 쌀은 평균 길이 3.7㎜, 너비 1.6㎜로서 길이와 너비의 평균 비례는 1.62이다. 이것은 자포니카종(Japonica種) 중에서도 단립극소형(短粒極小形)임이 밝혀졌다. 수수는 선사시대 것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이다.
이 유적에서 얻어진 방사성탄소연대는 140년(제7호 집자리), 서기전 566·691·721년(제8호 집자리), 서기전 230·670·970·1030·1260년(제12호 집자리), 서기전 160·340년(13호 집자리) 등이 있다.
몇 개의 극단치를 제외하면 대체로 서기전 6∼8세기에 모여 있어 청동기 전기에 해당되며, 그 연대는 구멍무늬토기·붉은간토기의 결합상으로도 뒷받침된다.
그러나 제12호 집터에서 피홈식 돌칼이 나온 사실은 이 곳 문화단계가 대체로 청동기시대 전기에 해당되면서도 그 실제 연대는 서기전 4∼3세기경까지로 내려올 가능성을 시사해주고 있다.
이 흔암리 유적은 전후 수백 년간 존속한 청동기시대 전기의 한강변의 농경민 취락지로서 한때 적어도 10채 내외의 집이 있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이들의 경작지는 외국에서의 경우로 미뤄볼 때, 지맥과 지맥 사이의 조그마한 골짜기로 추측된다.
쌀·보리·수수·조 등 여러 가지 곡식의 발견은 청동기시대 전기에 한강유역에서 쌀이 재배되었다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또한 우리나라의 벼의 전래경로가 화남(華南)→산둥반도(山東半島)→한국 중서부라는 종래 일부 학자들의 학설의 타당성을 증언하는 결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