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실(石室) 마을 앞, 한강에 면한 산 위에 있다.
한강 북안의 표고 80m의 얕은 산 위, 강과 반대쪽 경사면에 있는 유적으로서 1960년 주한미군 체이스(Chase) 상사에 의해 발견된 토기·석기들이 국립박물관에 기증됨으로써 알려졌다. 1961년 서울대학교 고고학과가 발굴해 6기의 주거지를 확인하였다.
이들 주거지는 경사면의 풍화 암반을 ‘L자’로 파내 조성되어 정상부 가까이에 3기, 그 아래쪽으로 3기가 옆으로 전개 배치되어 있다. 주거지는 앞쪽이 깎여 나가 정확한 크기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산쪽 벽의 길이가 2.5∼3.2m쯤 되는 모줄임[抹角]구형이며 산쪽 깎아낸 벽의 높이가 50∼60㎝ 정도의 것이 있었다. 집 안에는 노(爐)시설은 없었으나 불피웠던 자리가 한 쪽 구석에 몰려 있고 기둥자리는 없었다.
제3호 주거지에서는 바닥에 길쭉길쭉한 숯덩이가 섞인 단단하게 굳은 점토층이 약 10㎝ 두께로 깔려 있었다. 그것은 한기와 습기를 막는 구들장치로 생각된다.
한편, 다른 집들과는 달리 구릉 정상부에 자리잡은 제6호 주거지는 정면을 서남쪽으로 둔 3.2m×2.2m 평면의 집으로 기둥구멍은 역시 없고, 노지도 없고, 동쪽 구석에 지름 40㎝, 깊이 19㎝, 지름 55㎝, 길이 45㎝의 저장공이라고 생각되는 둥근 구덩이가 패어 있었다.
첫번 구덩이 속에는 흑도(黑陶) 장경호 1개분이 나왔다. 구덩이 바닥에는 길이 7㎝, 깊이 5㎝ 정도의 ‘+’자형이 패어 있었다. 경사면에 있는 집들은 기둥구멍이 없어도 기둥을 세워 서로 묶어 돌리고 뒷벽에 걸쳐 외쪽지붕을 씌우면 강에서 불어오는 강풍에도 무관하리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정상에 있는 제6호 집은 네 벽이 노출되어 있어서 이 지역 특유의 강풍에 견디지 못할 것이므로 지붕만의 천막식 집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저장공 속에 들어 있던 흑도장경호는 형식과 형태로 보아 특수 토기이며, 다른 집에는 없는 저장공의 존재, 정상부에 자리잡은 집의 위치 등을 감안할 때, 일반거주용의 집이 아닌 후세의 당집 같은 특수 건물로도 생각된다.
유물은 석기·토기뿐이다. 석기에는 타제석부·석창·단인석부·갈돌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냇돌로 만든 타제석부가 많은 것이 주목된다. 그것은 이 한강변 신석기시대 석기의 전통이 반영된 점에서 흥미롭고, 또 석촉이 없는 점이 특이하다.
토기로는 일반 무문토기와 함께 돌대(突帶)토기, 갈색마연(褐色磨硏)의 장경쌍이호(長頸雙耳壺), 흑도장경호가 있다. 갈색마연장경호는 체이스상사가 채집·복원해 국립박물관에 기증한 것이다. 아주 작은 바닥의 장경호 형태는 서북한 토기와 통하고 있다.
이 주거지의 연대는 돌대문토기, 흑도, 쇠뿔을 맞붙인 모양의 손잡이의 존재 등으로 볼 때, 철기시대(서기전 300∼0년경)에 속한다. 이 유적은 철기시대 초기의 한강 하류 무문토기인들의 취락의 크기 등 문화내용의 한 유형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